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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영자독서모임으로의 초대3 - 한국경제 죽어야 산다
발간일 첨부파일
현재 서울대학교 경제학부에 재직중인 정운찬 교수는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시고 콜럼비아 대학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얼마전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한국은행 총재의 추대를 받았으나 거절하시고 순수하게 상아탑에만 머무르기를 고집하시는 분입니다. 이번호에서는 정교수님의 "한국경제 죽어야 산다"라는 주제로 강의하신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저는 교수가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싣는 것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상아탑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객관적인 사고를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하고 글 쓰기를 마다했었으나, 제5공화국 시절인 1980년에 5. 17이 일어나고 이때에 제가 군인들에게 20시간 동안 서울대 관악사라는 기숙사에 감금당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현실을 우리가 너무 멀리하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어렴풋하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5공화국 시절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이 제가 보기에는 잘 안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 자기 생각을 언급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을 보고, "이렇게 침묵하면 안되겠구나. 다들 침묵하면 정부가 하는 것이 다 잘된 것으로 착각을 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때부터 조금씩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의 글들을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하게 되었고 그 글을 모은 것이 이 책입니다. 이 책은 하나의 토픽을 가지고 쓴 것은 아니지만 다음과 같이 간단히 요약해 보았습니다.
1. 얼치기 정치에 멍드는 경제 한국경제는 현재 심각한 불균형에 시달리고 있다. 불균형은 지난 20여년 동안의 성장의 특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난날의 성장은 경제적인 합리성보다는 독재정권의 정치적 고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가장 긴급한 과제이며 성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 있는 경제성장에 초점을 맞추었다. 정부는 성장만 할 수 있다면 그 내용 여하를 가리지 않는 개발철학을 갖고, 이에 따라 경제성장의 목표는 달성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생겨났다. 더 나아가 지난날의 성장은 물질적인 것이었다. 경제성장이 경제지표, 특히 거시경제지표에 의해 평가되어 온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목표달성 위주의 물량적 성장이 경제 각 분야, 더나아가서는 사회 각 분야의 균형적 성장을 저해하고 여러 가지 불균형을 배태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균형으로 인해 가진 자들에게 모든 것이 집중되는 형평성의 문제가 야기되었다. 경제사회를 어느 특정 그룹이 지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경제성장의 궁극적 목표, 즉, 대다수 국민의 풍요롭고 자유로운 생활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직접적으로 갈등구조의 심화는 경제의 성장 잠재력 자체를 마모시킨다. 왜냐하면 경제는 갈등에 의해서보다는 협력에 의해서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균형은 반드시 해소되어야만 한다. 불균형 해소를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과거 목표달성 위주의 성장정책을 포기해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경제정책을 보면 '소득 3배가 운동', 내용을 고려하지 않은 규제완화 정책, 선거용 선전정책 등 중장기적인 안목의 개혁보다는 단기적으로 국민의 인기에 영합하는 경제정책을 추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 성과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단기적인 경기부양책을 사용해 왔다. 그러나 우리나라 경제의 문제가 구조적인 것이었고, 더 이상 외연적 성장을 기대할 외적 내적 상황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단기적이고 전시적인 부양책은 부작용만 일으켰다. 한국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를 치유하는데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잠재적 성장능력을 늘리고 경제의 형평성을 제고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절실한 것은 경제의 운행규칙을 확립하는 것이다. 지속적 성장능력 배양을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제조업의 생산기반 확충이다. 또한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가 늘어야 한다. 외연적 성장의 단계에서 내연적 성장의 단계로 진입한 이상 이노베이션이 없이는 수지를 맞출수 도 없고 성장할 수도 없게 되었다. 형평성을 위협하는 가장 커다란 요인은 지난 20여년 간 고도성장 과정에서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재벌이다. 집단으로서의 재벌은 국가의 의사결정과정에 직ㆍ간접으로 깊숙이 관여하였고, 이것은 제6공화국 초기에 점진적으로나 추진되던 형평을 위한 여러 가지 제도 개혁이 모두 재벌의 로비에 의해 용두사미로 끝난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재벌은 어떤 형태로든지 정리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자유경쟁에 의거한 경제의 운행규칙을 확립하는 것이다. 강자생존이나 대자생존이 아닌 '적자생존의 원칙' 다시말해 '자본주의 원칙'이 지켜지도록 해야한다. 기업의 진입의 자유가 허용되고 또 크기에 관계없이 능력없는 기업은 퇴출의 엄정성이 지켜져야 한다.
2. 도그마로부터의 탈출 베이컨은 당대인들에게 '동굴의 우상'에서 헤어나라고 가르쳤다. 나는 그의 가르침이 오늘날에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시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오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경제 또는 비경제부문에 극복해야 할 도그마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규모의 경제'에 대한 신념이다. 기업의 규모를 늘리면 단위당 생산비가 절감되어 경제적이라는 아이디어는 많은 사람들이 신봉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통하는데도 있고, 통하지 않는데도 있다. 그런데 기업들은 왜 끊임없이 규모를 확장하려 하는가, 그것은 정부가 중소기업에 적자생존의 원리를 적용하면서도 일단 대기업만 되면 면파산부(免破産符)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규모 늘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업의 범위를 넓히면 경제적이라는 '범위의 경제'를 내세워 너도나도 사업다각화에 혈안이다. 사업다각화의 극치는 문어발식 경영이다. 그러나 경제 전체로 보면 문어발식 경영은 득보다 실이 크다. 창조적으로 도태되어야 할 기업이 퇴출되지 않고 희소한 실물자원과 금융자원을 낭비하면서 자원배분을 왜곡시킨다. 그렇다고 재벌더러 자발적으로 문어발식 경영을 포기하라고 권유해야 소용없다. 룰을 만들어 유도해야 한다. '인플레이션은 화폐적 현상이다'라는 인식도 하나의 도그마이다. 돈이 풀리면 틀림없이 인플레이션이 생기고 역으로 인플레이션은 돈이 풀린 증거라는 경직된 화폐수량설적 사고관이다. 화폐수량설적 사고는 물가안정을 최고 목표로 삼았던 제5공화국 정권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물가안정을 위해 가장 손쉬운 수단으로 물가를 직접통제하고 통화량을 조정했다. 그러나 단순한 발상이 가져온 부작용은 컸다. 다른 무엇보다도 사회간접자본 부족 등 생산기반구축의 부진은 오늘날까지 성장잠재력 배양의 애로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비록 통화량 조정으로 물가를 안정시키더라도 그 과정에서 금융시장이 겪을 대혼란과 중소기업의 자금난은 정책성과의 빛을 바래게 했다. 문제는 인플레이션 자체보다는 그 내용이다. 한국의 인플레이션은 한국경제 전반의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하는 것이 크므로 구조개혁이라는 근본적인 과제를 뒷전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이러한 현실을 무시하고 무리한 긴축을 하면 인플레이션은 조금 완화될지 몰라도 경제는 심각한 슬럼프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규제완화에 대한 것도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 각종 규제를 풀고 나라 문을 활짝 열기만 하면 금방 제2의 도약이라도 이룰 것 같이 생각하고 있다. 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경제에 창조적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경제에 신축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일부 재벌총수들과 극단적 시장신봉자들은 모든 규제를 완전히 철폐하라고 아우성이다. 마치 규제가 모든 경제문제의 원인이었던 것처럼 목청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규제의 완화는 필요하지만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점이 규제완화로 풀리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발상이다. 오히려 탈 규제의 제반 조치들이 목적과는 상관없이 재벌의 이익만을 반영하도록 전개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진입구조조정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없이 자유방임적 정책을 시행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비대한 재벌에 경제력의 집중을 심화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재벌들은 중소기업이 독자적 기술 개발이나 연구에 주력하도록 지원하기보다는 불안정한 하청체계를 이용하여 중소기업간의 제살 깍아먹기식 경쟁을 부추겼고 결국 그들을 아사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튼튼한 중소기업 없이는 건실한 경제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다시한번 강조하거니와 규제완화가 필요하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집 한 채를 짓기위해 도장을 수십번 또는 그 이상 찍어야 하는 국가가 어떻게 능률적으로 움직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규제완화가 결코 자유방임과 혼돈되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