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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영자독서모임으로의 초대36: 오사카 상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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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상인들/홍하상 작가

오사카는 어떻게 하다 보니 전세계 중에 제가 가장 많이 가게 되었던 도시인 것 같습니다. 1993년쯤에 MBC에서 국장님이 저에게 오사카에 가면 사천왕사라는 절이 있는데 사천왕사에서 하는 ‘왔소’라는 축제를 찍어서 방송을 하라고 해서 오사카에 간 적이 있습니다. 오사카에 도착해서 제가 제일 궁금했던 건이 사천왕사까지는 알겠는데 왜 하필이면 ‘왔소’냐. 한국말의 ‘왔다’라는 말이 아니냐. 이것이 제일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주지스님을 만나서 왜 사천왕사의 축제이름이 사천왕사 왔소요. 왔소라는 말은 한국말의 왔다라는 말입니까? 그랬더니, 주지스님 말씀이 당신이 말하는 그대로 한국말의 왔다, 왔다가 축제 이름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옛날에 지금부터 1400년 전에 서기 4~600년 경에는 백제로부터 배에다 많은 물건을 싣고 다도해를 지나 오사카의 마지막 종착역에 짐을 풀었는데 이때 백제로부터 많은 물건을 싣고 오면 미리 와 있던 백제의 이주자들이 길거리에 서서 선박에서 내린 물건이 사천왕사를 향해 들어갈 때 이주자들은 박수를 치고, 물건을 가지고 온 백제사람들은 왔소! 왔소! 하면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사카에서 가장 큰 축제고, 사천왕사 자체가 오사카에서 가장 큰 절입니다.

일본의 고대사를 연구해보면 실지로 문명이 건너와서 오늘날의 일본을 만드는 터전을 고대에 만든 사람은 가야 사람과 백제 사람으로 유가야가 서기 562년이 되면 완전히 멸망하며 일본으로 건너가서 우리 동해와 마주보고 있는 시마네현, 도또리현에 터전을 잡고 살게 됩니다. 그런데 가야 사람이 일본에 갈 때 빈손으로 간 것이 아니라, 칼과 창을 만들 수 있는 철기문화를 가지고 가죠. 가야를 뒤따가 백제가 들어갔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스카입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일본 사람들이 자신들의 조상이 한반도에서 왔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5대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 가오시마 남쪽의 심수관요, 이런 사람들은 임진왜란에 끌려간 사람 아닙니까? 큐슈 북부에 있는 가라쓰라는 곳의 당진요 같은 경우도 한반도 남쪽에서 끌려간 사람이 도요를 열었고, 일본 도자기의 선조라고 하는 이찬평이라고 하는 사람도 임진왜란 때 끌려가서 도조(일본 도자기의 선조)라 불리고 있거든요. 일본 사람들은 요새 일본 도자기의 원류는 한국이라고 공표합니다. 1998년도가 일본 도자기 400년 역사였는데, NHK에서 하루 종일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 도자기 원조들이 끌려왔던 지역을 다 표시하면서 여기는 누가 끌려와서 어떤 도자기를 만들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이야기를 본론으로 들어가서 사천왕사라는 절은 593년에 창궐이 되었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라고 하는데, 이 절을 지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라고 했더니 4 사람이다. 금강중강이라고 하는 사람이 백제로부터 일본에 건너와서 사천왕사를 지을 때 총 책임을 맡았다고 하여 혹시 금강중강의 자손들이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주지스님이 사천왕사에 동서남북의 4개의 대문이 있는데, 서문 바로 앞에 50m지점에 금강중강의 39대 자손이 지금도 살고 있다고 해요.

그래서 바로 그 길로 그곳에 갔습니다. 갔더니 7층짜리 조그만 빌딩인데 빌딩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금강을 그대로 하고, 공고구미. 금강조(金剛組)라는 간판을 건 회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금강리홍이라는 사장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사장이 자신은 기술자이고 절을 짓는 도목수 정도에 불과하여 인터뷰를 할 수 없다고 해서, 그럼 인터뷰는 하지 않더라도 당신네 집안의 역사가 정말로 옛날에 먼 조상이 일본에 와서 사천왕사를 지은 것이 사실인가라고 했더니 우리 1대 조상이 일본에 건너와서 사천왕사를 지었다. 성덕태자가 우리 1대 조상을 초청했기 때문이다. 성덕태자는 일본 역사의 가장 성군으로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일본의 헌법을 만든 사람입니다. 또한 성덕태자가 1대 조상이 사천왕사를 다 짓고 나니까, 너는 앞으로 자식을 낳거든 니 자식이 사천왕사를 관리하고 보수하고, 또 그 자식이 자식을 낳거든 사천왕사를 관리하고 보수하라. 대대손손이 세세천년 사천왕사가 영구히 보존될 수 있도록 너는 사천왕사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고 명령을 했습니다.

사천왕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39대손인 이 사장을 94년에 처음 만나서 제가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하니까 나는 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TV프로에 나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후 매년 연하장을 보내고, 하중서신도 있는데 그것도 보내고, 심심하면 편지도 써서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99년 12월 30일날 저보고 들어오라고 연락이 와서 바로 그날 짐보따리 싸서 오사카로 들어갔습니다. 보니까 1월 1일날 아침에 금강조 집안에 행사가 있었습니다. 금강조가 1400년간 오사카 사천왕사를 관리보수해 왔지만, 그 외에 절을 짓는 일에 나섰습니다. 그러한 구미의 조장들과 1월 1일날 금강조 사장이 아침식사를 같이 합니다. 그 조장들이 한 30명 정도 되더라구요. 성덕태자의 나무 조각이 모셔져 있는 함을 열어서 거기에 음식을 차려서 절을 한 후에 그것이 끝나면 구민의 조장들과 일본음식 오세치(정월 초하루에 먹는 음식)를 나누어 먹으면서 구미의 조장들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올해도 잘 해보자 하면서 정월초하루에 식사를 같이 합니다. 그 장면을 찍으라고 오라고 한 것이죠.

1월 7일이 되면 금강조 집안이 사천왕사 안에 있는 대웅전에 가서 성덕태자 및 부처님에게 올 한해도 공사를 안전하고 잘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라는 의미에서 생선 도미 같은 것을 차려 놓고 절을 합니다. 이것을 일본말로 전나하지메노시키, 이 말 뜻을 그대로 하면 첫 끌을 당기는 의식입니다. 우리는 대패로 깍지만, 고대 일본에서는 끌로 깎았습니다. 현장에서 보니까 굉장히 큰 끌로 나무를 탁 치면서 부처님, 올해도 일을 잘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우리에게 일을 주신 사천왕사에 발전을 기원하는 의식을 합니다. 이 사람이 1400년간을 40대까지 이어가면서 절을 지어왔는데, 어떻게 14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했더니 금강조 사장이 이야기 하기를, 3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 사장은 현장에 살아야 한다. 뭔 뜻입니까. 일대조상인 금강중강이가 백제로부터 오사카에 건너 온 이후 지금까지 자기네 집안은 사천왕사 서문 50m 앞의 자리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지금 금강조 집 앞이 8차선 도로이고 그 빌딩의 4층이 이분의 집인데, 자기 아버지도 그랬고, 자기 할아버지도 그랬고, 이 자리에서 1400년을 살아왔다. 그 이유는 작업장도 자신의 집 근처에서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 종류의 직책들이 자기 집을 중심으로 일을 하면서 자신 집의 마누라가 가져다주는 밥을 먹으면서 일을 했다. 그 일이 바쁘면 새벽까지도 진행되니까, 그 사람들을 계속 독려하고 격려하고 지도하면서 현장에서 1400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들이 버틸 수 있었다. 사장은 현장에 살아야 한다.

두번째는 원리원칙에 충실하라. 원칙에 충실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제가 사장을 쫓아 공사를 한다는 절에 가봤더니 요즘엔 일본도 목조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철근으로 합니다. 보통 기소를 치는 것이 50전 정도 치면 되는데 자를 가지고 재보니 70전을 쳤어요. 그래서 제가 왜 50전만 치면 되는데 철근과 시멘트가 더 드는데 70전을 쳤습니까. 그랬더니 50전이 기준이지만, 이 건물의 안전을 위해서 유사시 지진을 대비해서 기소를 20전 더 쳐버렸다. 그러면 원리원칙에 충실한다는 말이 이 건물에서는 어디를 봐야 원리원칙에 충실한 것입니까. 그랬더니 천장 속에 들어가 보겠느냐. 그래서 천장을 현장감독에게 뜯으라고 했어요. 여기 천장을 들어가 봤더니 천장 속이 예술이에요. 천장 바닥에 진공 청소기로 밀어야 그렇게 깨끗할 것 같애. 바닥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비질을 기가 막히게 했어요. 또 하나는 천장을 받히고 있는 나무들을 빗금 사선으로 했는데 나무의 대패질 한 것이 거의 비단결같이 잘 해놨더라구요. 그런데 이 천장 속에 들어간 나무가 천장 밖에 쓴 나무보다 더 비싸다. 자신들은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 더 좋은 재료를 쓴답니다.

그래서 이것이 1400년을 살아남은 노하우냐. 그랬더니 또 있다. 내가 찾아가서 현장감독 만나서 진행사항 듣고, 문제점 듣고, 틀린 것 지적해 주고, 갈 때 수고하라고 지적해주고 하려면, 자신이 다닐 수 있을 만큼만 공사를 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양반이, 내가 이렇게 나이가 먹었어도 현장을 열심히 다니는 이유가 있다. 내 위에 할아버지가 금강조 37대인데 37대일 때 우리 집안이 한번 망했다. 그때 중일전쟁이 터져서 전쟁이 터지니까 절을 지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공사를 발주를 안 해서 중일전쟁 시절에 일본의 모든 공사가 올 스톱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하죠. 37대 조상이 전쟁 와중에서 회사를 이끌어나갈 수가 없으니까 일본도로 할복을 해서 죽어버렸어요. 그래서 초상을 치른 후, 그 37대의 부인이 사천왕사를 갑니다. 가서 주지스님을 만나 이제는 사천왕사가 우리 집안을 도와주셔야 할 때입니다. 주지가 들어보니 할 말이 없거든. 그래서 주지가 마침 태풍으로 5중탑이 무너졌다. 저 탑을 다시 일으켜라. 이렇게 일거리를 줍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직원들을 다시 다 끌어모아서 3년간 현장에서 먹고자고하고 진두지휘하면서 5중탑을 세웁니다.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이, 사장님은 한국 사람입니까, 일본 사람입니까라는 유치한 질문을 던졌죠. 지금생각해보면. 그때는 애국심도 아니고 참 이상한 질문인데, 그랬더니 이 양반이, 우리 조상이 백제에서 건너왔으므로 피는 어디 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백제인이고,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해요. 그래서 그 아들에게도 똑 같은 질문을 했어요. 이 사람은 미국 UCLA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이에요. 아주 유식한 사람이죠. 아버지는 유식은 아니고 고집쟁이 영감탱이고, 아들은 많이 배운 사람이고. 그랬더니 아들은 나는 미국 유학을 갔다와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한국 사람이다, 일본 사람이다라는 것을 따질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다. 나는 그냥 가업을 이을 뿐이다.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금강조가 개업을 하던 당시인 서기 580년경에는 고대 백제와의 교역을 통한 문물이 중심이 되어 오사카가 일본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았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서기 500년 때부터 1000년간 오사카는 나름대로 발전을 하긴 하는데, 나중에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1580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이가 일본을 천하통일 하면서부터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본 풍신수길이는 난세의 지략가입니다. 천하가 자기 손에 들어오자 풍신이가 한 정책은 3가지 정책이었습니다. 오사카 옆에는 교토가 있다. 교토에는 천황이 산다. 천황은 허수아비다. 허수아비긴 하지만 천황을 따르는 가신이 너무 많다. 천황이 다 죽어가는 산 송장같지만 천황을 따르는 무리들이 자기처럼 비천한 놈을 칠려고 맘만 먹으면 자기는 죽는다. 그래서 이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천하의 쌀을 오사카로 모은다. 그것이 첫번째였습니다. 1591년의 일본의 쌀 생산량을보면 2700만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쌀이 일본 어디에서 생산되던 당장 먹고 사는데 쓰이는 쌀을 제외하고 여유분의 쌀을 오사카로 모아라. 그래서 풍신수길이는 오사카에 미시장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두번째, 풍신수길이가 쌀 다음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생선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소고기를 먹은 것이 메이지 유신 1868년 이후입니다. 그래서 천하의 생선을 오사카로 모조리 끌어들이는 것이 경제력을 장악하는 핵심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반찬이 있어야 합니다. 손톱만큼 짜게 만든 쯔게모노입니다만, 배추나 무라던가 등의 각종 양념인 채소를 오사카로 끌어모으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아야 하는데 쇼군이 명령을 했다고 일방적으로 물자가 한꺼번에 다 모이지 않습니다. 이 물건들을 가지고 공급과 수요를 잘 조절하면서 이윤을 남기면서 자기에게 충성할 수 있는 놈을 선발해야겠다. 그래서 풍신수길이가 4곳에 있는 상인을 집중적으로 끌어들입니다.

그중 하나가 교토에 있는 후시미(伏見) 상인입니다. 이 상인은 지금도 교토에 있지만, 옷을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는 상인입니다. 비단뿐 아니라 옷에 관한 상권을 확실히 쥐고 있었고, 이를 통해서 무한대의 이득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토에 있었기 때문에 천왕 및 가신에 대한 옷감 공물을 이들이 했습니다. 오사카 성에 근무하는 옷도 필요하니 후시미 상인을 끌여들였습니다.

두번째가 오미(近江) 상인을 끌여모았습니다. 이들이 많이 판 것은 모기장, 다시마 입니다. 이들은 오사카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교토 인근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로 5개의 마을이 모여서 오미 상인이 형성이 되었는데 이들이 1600년대에 좋은 다시마를 구하기 위해 북해도까지 배를 타고 갑니다. 1년동안 생산되는 양을 맞춰서 좋은 것을 사가지고 옵니다. 이렇게 산 것을 들여왔을 때, 옛날에는 현금 거래를 했던 모양입니다. 오미 상인은 그것을 최초로 월부로 나누어서 받았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물건의 판로에 대해서는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전국에 나가서 1달 후에 오미에 모이면 다시마 1관의 값의 가격비교를 해서 값이 비싼 쪽으로 물건을 많이 보내고 값이 싼 쪽으로 적게 보냅니다. 이러한 상재가 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1달에 1번씩 모여 정보를 교환했습니다. 이러한 오미 상인을 오사카로 불러들입니다.

이어서 사카이(堺) 상인을 불러들입니다. 사카이 상인은 총으로 유명합니다. 임진왜란때 일본 애들이 부산에서 한양까지 걸어들어오는데 1주일이 걸리는데 전쟁을 하면서 오는데도 1주일이 걸렸습니다. 칼과 창을 가지고는 총을 이길 수 없습니다. 차원이 다른 전쟁인 것이죠. 이 문제의 총을 만드는 상인이 사카이 상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부릅니다.

그 다음에 히라노(平野) 상인을 부릅니다. 지금도 오사카의 히라노라는 곳에 가면 제약 회사와 약방이 무지하게 많습니다. 히라노 상인은, 일본은 툭하면 전쟁이 터지고 죽고 다치니 약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이 히라노 상인을 약종상으로 대량 불러다 놨습니다. 그리고 얘네들에게 쌀과 생선과 채소를 너희가 장악해라. 그리고 나에게 세금을 잘 바쳐라.

그래서 이 4명의 집단의 상인들이 오사카에서 장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사카에 가면 요도야(淀屋)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문제는 요도야 부근에 쌀창고가 있었습니다. 이곳이 일본 전역에서 거둬들인 쌀을 보관하는 곳입니다. 쌀을 천장까지 쌓아두었는데, 물이 들어서 장마가 져서 한번 젖은 쌀은 먹지를 못합니다. 금방 젖어버리고, 해가뜨면 바로 썩어버립니다. 그래서 풍신수길 입장에서는 기껏 공을 들여서 천만석의 쌀을 요도야 근처에 다 모았는데 장마로 쌀이 침수될 상태가 되니 고민을 합니다. 천하의 경제력을 재수없으면 장마 한 철에 다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고민을 하던 차에 요도야 조안이라고 하는 친구가 풍신수길이를 찾아옵니다. 합하. 제가 장마에 대비한 토목공사를 벌일 테니, 저에게 그 권한을 주십시오. 풍신수길 입장에서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 전권을 위임했습니다. 요도야가 강 재방에다가 쌀 가마니를 전부 쌓아두고, 쌀 한가마니와 돌 한가마니를 1:1로 바꾸어주겠다는 공고를 붙입니다. 순식간에 요도야에 돌로 쌓은 제방이 1주일만에 생겨버렸습니다. 나중에 비가 와서 장마가 와서 침수될 줄 알았는데 돌을 워낙 높이 쌓아서 제방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창고에 쌓아둔 쌀이 하나도 피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돌과 쌀을 1:1로 바꾸었으니 엄청난 경비가 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도 장마가 들어 모든 쌀을 잃어버리는 것보단 그것이 낫다는 겁니다. 그래서 풍신수길이가 요도야를 불러 대단한 칭찬을 합니다. 천하의 상인이 왔구나.

그래서 풍신수길이가 오사카를 다스리면서 경제력을 구축하던 사이, 풍신수길이가 쓸데없는 망상을 갖지 않습니까. 조선을 먹어야겠다. 풍신수길이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위해 후쿠오카를 갑니다. 후쿠오카에는 카미야라는 상인이 있습니다. 풍신수길이 카미야의 집에서 하루 자고 카미야에게 다회를 열어줍니다. 쇼군의 부탁은 조선을 칠 테니 배를 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부산과 마주보고 있는 후쿠오카에서 오랬동안 한반도와 교역을 했던 사람입니다. 밀물과 썰물이 어떻게 되고 조수의 방향이 어떻게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쇼군이 부탁을 하는데 거절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카미야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배를 가지고 풍신수길이를 지원합니다. 임진왜란 8년 동안 조선을 먹을 줄 알았던 풍신수길이는 이순신을 만나 박살이 나면서 마지막엔 병들어 죽게 됩니다.

풍신수길이가 죽기 3년 전에 애를 낳았습니다. 풍신수길이 죽은 후 도쿠가와 이에아스가 드디어 때가 왔다. 풍신수길이 죽었으니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야 단칼이다. 쳐라. 그래서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서군과 도쿠가와를 중심으로한 동군이 격돌을 벌이게 됩니다. 그 격돌의 장소가 세끼가하라 라는 장소입니다. 여기는 오사카와 동경의 정확히 가운데에 있습니다. 굉장히 큰 벌판인데 그곳에서 양쪽 군대가 격돌하게 되죠. 요도야가 풍신수길에게 충성을 다해 재방을 쌓았던 사람인데, 천하의 중심이 풍신수길에서 도쿠가와 쪽으로 기울고 있구나는 것을 느낍니다.

요도야가 도쿠가와를 찾아갑니다. 합하, 곧 전쟁을 하실텐데, 제가 합하를 돕고 싶어서 왔습니다. 제가 쌀을 대드리고 텐트를 지어드리겠습니다. 요도야 조안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지만, 일본 말로, 지금의 상황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때다고 해서 그의 도움을 받습니다. 도쿠가와가 결국 전쟁에 승리를 하고 요도야를 부릅니다. 그대 덕분에 전쟁에서 이겼다. 소원이 무엇이냐? 들판에 널려있는 시체를 치우게 해주십시오. 온 들판에 시체가 널렸는데, 상인이 와서 알아서 치우겠다고 하니 내심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라. 요도야 조안은 그 다음날로 병력을 풀어 들판에 널려있는 시체를 치우기 시작합니다. 시체 옆에 떨어진 칼과, 창과, 갑옷과 투구를 반드시 챙겨라. 인부들은 칼과, 창과, 방패와, 갑옷 등을 싹 걷으니 칼이 수만자루요, 방패도 수만개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도쿠가와 이에아스가 역시 천하의 장사꾼은 장사꾼이다라고 이야기 했답니다.

도쿠가와 이에아스가 천하를 통일 한 이후 일본은 동과 서의 지역 감정이 시작됩니다. 세끼가와라는 곳에서 동경에 본거지를 둔 도쿠가와 군대가 서쪽 오사카에 본거지를 둔 풍신수길을 이김으로 천하의 패권이 오사카에서 동경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물론 많이 쇠퇴하였지만 오사카 상인은 지금도 일본 경제를 좌지우지 하고 있습니다.

쓰미토모 재벌도 오사카를 기반으로 풍신수길 시대에 일어난 재벌입니다. 미쓰이도 삼정, 오사카를 기반에 둔 기업입니다. 제작년까지는 기린 맥주가 1위였는데 지금은 아사히 맥주가 천하통일 했습니다. 그 다음에 라면을 최초로 만든 회사가 일본의 닛신식품입니다. 일본에 좋은 백화점이 많지만 그 중에서 제일 비싼 물건을 팔고 일본 사람들이 제일 좋은 백화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카지마야 백화점입니다. 어린이들이 하는 닌텐도 게임이 오사카가 기반입니다. 그러나 앞에 열거한 모든 기업을 한방에 이길 수 있는 기업가, 내셔날, 파나소닉그룹의 마쓰시다고노스케도 사실은 오사카 상인이었습니다.

일본이 우리보다 막강하게 잘 하는 이유는 대기업도 잘 하지만 그 밑에 받치고 있는 중소기업도 막강하게 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중소기업 하는 사람들을 대기업이 키워주지 않고, 한마디로 국민들 조차도 중소기업 하는 사람이나 상인을 장삿꾼으로 이야기를 해 버리니, 중소기업이나 상인들이 발전하지 못 했하고 있습니다. 툭하면 대기업이 상다리 깍기라고 해서 이런 식으로 깍다보면 상다리는 없고 뚜껑만 남습니다. 일본은 IMF가 아니라 어떤 최악의 위기에서도 중소기업의 마진은 반드시 5%이상을 보장한다는 자신들의 묵계가 있습니다. 대기업들이 아무리 자신이 어려워도 중소기업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일본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예정 연구원 yjlee@ip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