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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영자독서모임으로의 초대35: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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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금난새(유라시안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여러분, 대단히 반갑습니다. 사회에서 경험과 연륜을 가지고 계실텐데, 여기 혹시 지휘자는 없으신가요? 다행이군요. 제가 지휘를 하기 때문에, 여러분께서 안 하시는 일이고, 비슷한 사람이지만, 본인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한번 들어볼까라는 생각을 하실 수 있지 않나 합니다. 지휘자는 청중에게 등을 돌리고 지휘를 하기 때문에 연주를 할 때는 잘 안 떨거든요. 그런데 이게 팔자가 바뀌어서 보면서 눈을 마주쳐야 하니까 좀 떨리거든요. 박수 한 번 더 쳐주셔야..

 

오늘 2시간이 잡혀 있으니 그 안에서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독서라고 해서 제 책을 들고 있어서 진짜 떨립니다. 읽어 보셨나요? 내용이 어떠신 것 같으세요? 반쯤 읽으셨는데 책 값이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들으셨는지요?

 

여러분이 책 읽고 대화하는 프로그램 참 좋은 것 같구요. 책에 대한 것도 하겠지만, 제가 음악가로서 활동한 활동을 이야기 하면서 여러분의 일에, 앞으로 하시려는 것에 도움이 된다면 더 좋겠고, 그 다음에 책에 대한 질문 해주시면 저 나름대로 대답하면서 서로 시간을 가질까 합니다.

 

저희 아버지가 작곡가셨고, 해방 이후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햄릿형이 있고, 돈키호테형이 있다면 아버지가 돈키호테형 이였어요. 다행인 것은 저희가 아버지께 돈키호테형이라고 하면 웃긴다고 하시면서 농담을 받아 줄 정도의 돈키호테입니다. 자식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 나오는데, 저도 둘 다 받았습니다. 아버지 쪽으로 받은 것은 돈키호테적인 것은 닮은 것도 있습니다.

 

저는, 지휘자이지만, 중1때 제일 인상적인 말이 있었어요. 사람은 사람을 하나 만나는 계기로 사람이 달라지고 책을 감명 깊게 읽거나 인상 깊은 이야기를 들으면 인생이 달라져요. 어떤 선생님 매 학기 강의를 하지만, 강의 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나고 그 사람이 이야기한 재미난 에피소드만 기억을 하는 것처럼 여기 선생님은 자신이 기억하는 인생에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제 인생을 살 때, 케네디가 대통령이 된 이후 취임연설 끝에, 국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까를 묻지 말고, 우리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지 생각하라는 것이 다 아는 이야기인데, 그 때에는 새로운 정신, 새로운 반응을 일으키게 된 것 같습니다. 그때 저는 중1이었는데 참 멋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한 생각이 삶에 항상 맴돈다고 할까요.

 

우리 나라 사람을 보면 중요하게 보는 것은 집안, 학교, 가족, 회사 등의 소속에 대한 것을 중시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어릴 때, 좋은 친구들과 사귀어야 공부도 잘한다는 말을 하지만 결국 보면, 내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내가 평범한 학교를 나왔지만 나로 인해 그 학교가 유명해지면 어떨가? 그러면 자신이 어느 소속에 있던 나로 인해서 어떤 변화가 오면 어떨까라는 것이 저에게 맴돌고 있는 케네디의 말입니다.

 

제가 독일에서 유학을 했는데, 거기에는 지휘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작곡과를 나왔지만, 독일 의사도 면허가 없으면 안되니까 증이 있어야 하듯이, 지휘를 할 수 있는 증이 없으니까 무언가 졸업장을 받고 싶었어요. 그런데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독일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은 한국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독일에 가서 음악 외의 것들을 보게 되는데, 독일 사회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쳤습니다. 음악을 배우러 갔는데, 벨리필이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인데, 그 오케스트라에도 감동을 받았지만, 청중들의 보는 자세를 보며 오케스트라 이상으로 나는 그 청중에 엄청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가요, 독일에 학교 들어갈 때는 지휘과에 필요한 과목이 10과목이 있었는데 5과목은 PASS를 하고 5과목은 PASS를 못 해서 입학을 못 했죠. 우리나라는 학교 안되면 엄청난 벼락이지 않습니까? 대학까지 나왔는데 안 되다니 어떻게 하나, 겨우 유학을 왔는데, 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저에게 뭐 그렇게 걱정하냐, 다음에 또 치면 되고, 누가 너의 1974년을 관심을 가지냐, 너가 좋은 음악가가 되었을 때 너에게 관심이 있을까 말까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나 해라, 그래서 그것이 위로가 되었죠. 그런데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5과목은 되었으니 보지 말라는 거에요. 지난 번에 PASS 했잖냐고, 안 된 것만 PASS하면 된다고, 그래서 5개만 집중으로 했으니 겨우 된 것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 가지고 교육정책을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사람들은 사람과 사람을 경쟁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공 수준과 Standard를 놓고 거기에 되면 10명도 뽑고, 거기에 안되면 1명도 안 뽑고 이런 식의 잣대가 다르다는 것에 굉장히 놀랐습니다. 우리나라는 다 똑똑한 아이들 데려다 놓고 100명 중에 20명 뽑으니 나머지 80명 떨어트리는데, 그 아이들이 자신을 다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죠. 저는 이 자체가 하나의 쇼크였고, 이것은 생각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학교를 들어갔습니다. 워낙 제가 하고 싶은 공부였고, 들어갈 때 힘들었기 때문에 이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열심히 할 수 밖에 없었고, 음악을 듣고 여러 순간 감동을 받아 울었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울 수 있다는 것에, 저는 벨리필 하모니가 전원이라는 교향곡을 하는데 오케스트라가 있으면 오케스트라 뒤에 벤치가 있는데 그 표가 학생표가 우리나라 돈으로 5000원입니다. 학생들은 다 거기 앉아요. 자기 선생 뒤에 앉아서 보는 것이죠. 베토벤의 5악장 중 4악장인데, 번개가 치고 폭풍이 치고 물이 넘치는 자연의 드라마틱한 것을 음악으로 표현을 하고 5악장은 모든 폭풍이 사라진 후 삶에 대한 감사, 자연에 대한 감사를 표현합니다. 4악장을 연주를 하는데 바로 오케스트라 뒤에 앉아서 정말 제가 연주를 들으면서 일생에 처음으로 펑펑 울었습니다. 저에게 제가 질문을 한거에요. 베토벤이 지금 여기 살아 있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베토벤 시대엔 이런 오케스트라가 없었을 것 아닙니까? 물론 귀가 잘 안 들렸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예술가가 쓴 작품을 누군가에 의해 연주되고 청중에게 심금을 울린다. 더 복잡하게 생각하면 독일하고 관계 없는 나라의 젊은이가 현장에 와서 울 수 있었다는 것. 제가 열심히 할 수 있었던 에너지는 좋은 연주를 보면서 열심히 할 수 있었지 않나.

 

열심히 하다보니 제가 뛰어나졌습니다. 입학은 할 수 없이 되었지만. 그래서 제가 국제 카라야 콩클에 입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1977년인데, 제 나이가 딱 30살이었습니다. 그것은 30세까지만 나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안 되면 제게 마지막 기차를 탄 것이었고, 저는 나가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게 생각을 했는데, 거기서 입상을 했고, 또 사람들은 한국 사회에서는 국제 콩크르에서 지휘자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많이 환영했습니다.

 

제가 콩크르에 입상을 하니, 오케스트라에 카라얀이 있었고, 사무장이라는 총 감독이 있는데, 그 분은 닥터 스트레제만이라는 분인데, 할아버지가 비스마르크 시대에 재상을 한 분이에요. 나이가 80세가 되는데, 40~50년 동안 많은 아티스트가 성장하는데 뒤에서 가이드도 해주고, 충고도 해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심사위원장이었어요. 그때 카라얀이 절 점수를 잘 안 줬지만, 이 심사위원장이 제게 점수를 좋게 준 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에게 조언을 구했어요. 제가 저의 미래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저는 독일에서 공부를 했으니 프랑스나, 영국에 가서 공부를 더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내심하면서 그 분에게 갔는데, 그 분은 그냥, 넌 참 재능있는 사람이다라는 흔히 하는 칭찬 한 다음에, 내 생각에 너는 한국에 가서 일하면 좋겠다라고 하는 거에요. 전혀 제가 기대하지 않은 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고, 많은 경험을 통해서 말을 하는 것이라 그냥 흘려버릴 수가 없었어요.

 

자신이 볼 때, 일본이 굉장히 빨리 발전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1977년입니다. 이제 한국도 굉장히 발전을 할 것 같다. 발전할 때 그대가 그곳에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그래서 저는 이 말을 굉장히 가슴에 두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더 큰 꿈을 꾸었는데요.

 

1980년도부터 우리나라의 KBS 교향악단, 80년도는 국립교향악단이었고, 81년부터 KBS가 되고 그랬는데, 제가 80년도 1월 1일부터 한국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KBS에서 제가 12년 지휘자로 있었습니다. 제가 33살로 지휘자가 되었는데, 그 전에는 나이 많은 분이 지휘자니까 선생님이니까 시키면 싫어도 따라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단원들 중에 제일 나이가 어렸습니다. 제 선생님도 계셨구요. 70~80명이 있으니까 저는 굉장히 행동도 조심해야 했고, 그래서 여러가지 조심을 하면서 저는 꺼꾸로 KBS라는 조직 안에서 한국 사회의 여러면을 경험했습니다. 이점은 좋지만 이점은 본받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가지 우리 나라에서는 프로페셔널 한 것이 없는 곳이 있어요. 예를 들어 A라는 전공을 나와 C를 할 수 있죠. 그렇지만 A를 했으면 A죠. 피아노를 했으면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지 바이올린을 할 수 없는 것이거든요. 예를 들면, 그런 식의 디테일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죠. 우리나라의 많은 오케스트라들은 아직 프로페셔널한 연주자가 없다는 것이죠. 전부 학교에 갑니다. 외국에서 공부를 하면 다 학교에 가는 것이 최고라는 것이죠. 일단 수입이 많고 정년이 있습니다. 연주라는 것은 연주를 연마를 해야 하지만, 학교는 가르치는 것이 능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다르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teaching을 선호한다는 것이고, 그럼 발전이 없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KBS는 다른 곳보다 2배정도 주는 등 파격적으로 하려고 했지만 학교에 가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아닌데 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지휘자로서 제 자신을 관리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2~3년 지나니까 서울대학교에서 저에게도 학교에 오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표현을 잘 했지만, 난 지휘자이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고 거절을 했더니 학교에서 이상하게 생각을 한 것이죠. 서울대학인데 거절을 하는가라는 표정이었어요. 저는 꺼꾸로, 우리나라의 문화정책이 있다면 KBS에 있다가 당신 부산에 가서 2년 하고 제주도 가서 2년하고, 검사들의 공직자처럼 순회근무하면 어떨까. 저는 독일에서 느낀 것 중에 우리나라는 왜 서울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지 않습니까? 물론 런던도 그렇습니다. 파리도 그래요. 독일은 베를린이라고 하지만 다 퍼져 있습니다. 10만명 규모의 도시에 가도 다 오케스트라가 있고, 평준화가 되어 있습니다. 시골이든, 도시이든 같은 질의 치즈를 먹고 살고, 오히려 지방 사람들이 더 잘 삽니다. 오히려 제가 한국에서 큰 눈으로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이죠. 바이로이트라는 10만도 안 되는 도시인데, 세계의 정말 부호들이 2~3년 전에 예약을 해서 모입니다. 그곳이 음악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도시입니다. 그런 것으로 볼 때 우리나라는 전부 서울에 모여있는 겁니다.

 

제가 군산에 1985년쯤 간 것 같습니다. 연주를 갔는데 콘서트 홀이 없어서 영화관에서 했는데 앉을 곳이 없어요. 60명 정도만 앉고 20명은 밖에서 처음 연주한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지방과의 격차가 있다. 만일 사람들이 제가 KBS 지휘자니까 음악도 모르면서 지휘 잘하나 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잘 모르면 KBS 지휘자니까 잘 하나보다. 군산의 지휘자면 못 하는 모양이다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이죠. 만일 내가 훌륭한 지휘자이면 KBS 지휘자니까 훌륭하다가 아니라 저는 거꾸로 내가 훌륭한 지휘자라면 무명의 회사를 건전한 오케스트라로 만들었을 때 그 사람이 CEO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1992년 수원이라는 도시를, 그 당시엔 잘 모르던 도시에요. 거기 오케스트라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거기 사무장이 우리 오케스트라가 1년 이상 지휘자가 없어서 단원들이 서로 갈라지고 연주도 안 해서 시에서 이것을 없애려고 합니다. 선생님,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것을 요청해왔길래, , 도와주고 싶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KBS에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KBS에서 연주를 50회하면 다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객원 지휘자도 있고, 내가 남는 시간을 오케스트라를 위해 일하고 싶다. 그랬는데, 결국 KBS가 밑에서는 용납을 했는데 위에서 용납을 못 해서, 같은 오케스트라인데 딴 오케스트라를 위해 일하는가? 즉, 제가 다른 일을 하는 것은 괜찮아요. 학교 나가는 것은 괜찮은데, 제 직업이 지휘인데, 지휘로서 다른 곳 가서 일하는 것은 안 된다는 거에요. 그러면서 수원 사람들을 욕을 하는거에요. 남의 지휘자 데려가려고 한다구. 그래서 하루만 생각하게 해달라고 했죠. 그래서 제가 결국엔 수원을 택했어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내가 싸워서 쫓겨가나보다. 능력이 없나보다. 별 말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저는 그것에 관심이 없었고, 저는 이제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으니, 그것이 제 새로운 팔자의 시작이었습니다.

 

수원 오케스트라가 어떤 것인지 모르니까 가봤어요. 갔더니, 500석의 시민 회관이 있는데, 거기에 오케스트라가 80명 정도 되었어요. 2층에 보니 저하고 사무장만 앉았고, 1층에 80명이 앉아 있는거에요. 80명이 80명을 위해서 연주를 하는 것이죠. 그것이 현주소였습니다. 1부에 서곡을 하고 피아노 협연이 끝났어요. 그 다음에 휴식이 있고 그 다음에 딱 들어오니까 80명이 40명으로 줄은거에요. 뭐냐면, 피아니스트 친척들이 온 거에요. 음악들으러 온 것이 아니니까 인사만 하고, 복도에서 잡담하고 그랬죠. 그것이 그 때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 다음날 첫 연습을 하는데, 여러분, 저는 부동산도 잘 모르고, 증권도 잘 모른다. 그러나 오케스트라에 대해서는 좀 안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니 내가 하는 일에 투자를 해달라. 그러니, 다들 표정이 음악가가 무슨 투자라. 하는 의혹의 눈으로 보더라구요.

 

1월 3일날 회사에 가면 관공서는 시무식을 합니다. 수원시청이 새로 지었는데 직사각형인데 처음 1층에 로비가 4층까지 딱 뚫리고 복도로 사무실이 있어요. 그리고 이 옆에 강당이 있는데, 1월 3일에 강당에 시무식하러 모입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시장이 시민의 손과 발이 되고, 돈 봉투 받지 말고의 이야기를 하면 30분입니다. 끝납니다. 저는 시무식이 시작된 후에 여기에 오케스트라를 셋팅을 하고 기다렸습니다. 정말 정확하게 10시 30분이 되니 층마다 걸어나오는 거에요. 그런 날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침 일찍 걸어 나오면서 아침부터 식사 빨리하고 화투나 칠까 하면서 나오는데 딱 나와보니 까만 연주복을 입은 오케스트라가 앉아 있는거에요. 사람들이 놀라고 있을 때, 새해에 저희가 왔고, 우리 오케스트라가 20분 정도 길지 않게 음악회를 하겠다고 하고, 경쾌한 행진곡, 왈츠를 하고 합창단이 있으니까 그리운 금강산을 했어요. 사람들은 기대하지 않을 때 뭉클하잖아요. 그러니 전부 서서 보고 중요한 시장 등만 의자에 앉았죠.

 

그날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너무 해피했던 거에요. 제가 이름도 안 까먹는데, 전영국 시장인데, 이분이 대단히 다혈질인 사람이었어요. 이분이 너무 좋다고 했을 것 아닙니까? 그 다음날로 국장을 불러서 오케스트라 저 사람들 보너스가 몇 %요. 400%입니다. 그럼 100% 올립시다. 그것도 좋겠네요. 어떤 사람은 오케스트라가 있는지도 몰랐던 거에요. 그런데 1월 3일 전 직원이 수원에 오케스트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고, 제가 가자마자 보너스가 올랐어요.

 

단원들이 투자하라는 말에 왜 그랬을까 했는데, 당장 효과를 본 거에요. 100%가 딱 올랐으니까. 그리고 돈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이죠. 이제 우리나라 대부분의 분야가 서로 모를 때가 있거든요. 공무원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생각을 잘 못해서 그럴 때가 있다는 것이죠. 그럼 뭐냐, 오케스트라는 그 나라의 문화의 수준이다. 고급을 생각하는 쪽으로 올려줄 땐 올려줘야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밴드나 군악대처럼 군대식으로 생각을 해서 미스 경기 뽑는데, 오케스트라 좀 나와서 하라고 하면, 단원들이 나름대로 수준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저쪽 공무원들은 저 친구들은 월급받으면서 시키는대로 안 하지 그래요. 이것이 서로 자존심이 안 됩니다. 미스 경기까진 좋은데, 활쏘기 대회라던지, 그런 것은 행진을 할 때는 관악기만 하면 어떻겠는가하면 말이 됩니다라고 하는데, 오케스트라는 현악기는 햇빛 받으면 안 되고, 걸어가면서 할 수 없는거잖아요.

 

제가 그런 것이 KBS에서도 있었다는 것이 있죠. 서로 존중하자는 의미에서 잘 해보자는 뜻에서 우리가 먼저 한 겁니다. 무조건 시킨다고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할 때 이런 것을 할 때는 하는 것이다. 그 이후 시에서 생각이 보너스 100%만이 아니라 음악가로 대우를 하기 시작한다. 그 변화가 돈보다 더 크다는 것이죠.

 

제가 월급을 KBS에서 그 때 만약 100을 받는다고 치면, 다른 곳에서 스카우트 해가면 그 이상 달라고 하는 것이 정상인데, 저는 아예 말을 안 했어요. 말을 하면 해줄텐데라는 것이죠. 그런데 저는 100인데 1/3도 안 되는 돈을 받고도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물론 항상 그러면 안 되겠지만, 저는 그 때 갔을 때는 돈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었죠.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간 것이고 요청을 안 한 것이죠. 공무원들이 그래서 무엇을 주는가. Respect를 주는 것이죠. 이 사람은 돈 벌로 온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을 주고, 물론 돈이 안 좋겠습니까? 하지만 사람의 가치는 돈으로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당신 하고 싶은대로 하십시오라는 상황이 된다는 것이죠. 제가 제 소신껏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지 돈은 300% 더 받고 소신껏 할 수 없다면 되겠냐는 것이죠. 자신의 미래에 대한 딜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어쨌든 저는 수원 오케스트라를 했는데, 그때 도립 문화예술회관이 있었어요. 도립에서 매년 국악단, 합창단, 오케스트라 단이 있는데 500만원을 주면서 작은 축제를 하라고 해요. 500만원을 80명으로 나누려니 얼마 되겠습니까? 그래서 나누지 않고 난 새로운 것, 오페라를 하겠다. 오케스트라는 간단합니다. 하지만 오페라는 옷도 해야 하고 무대 장치도 해야 합니다. 1주일 연습하는 것이 아니고 2~3달 연습을 합니다. 그런데 성악가들이 오페라를 해야 자신이 성악가라는 기분이 나니까, 2억 든다고 쳐도, 워낙 돈이 많이 나가니까 흑자가 없어요. 그렇지만 그분들은 하는거에요.

 

이것이 콘서트 홀이면 이곳에 피트라는 곳이 있습니다. 쏙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죠. 그 뒤에서 노래할 사람들 노래를 하는 것이죠. 우리나라 사람들 성격이 잘 보이는 곳에서는 열심히 해요. 컴컴한데 들어가면 대강합니다. 까만 양말 신어야 하는데 노랑 양말 신고 오고, 그리고 우리 것이 아니니까. 성악가들은 하다보면 실수를 많이 해요. 숨이 길어지고 그러면 또 틀리네 하면서 안 따라주면 안 되죠. 성악가들이 빨리 하면 빨리, 느리게 하면 느리게 따라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꿔다 놓은 보릿자루라는 말이 있듯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면 대강 합니다. 음악적으로도 행복하지 않고, 돈도 안 되는데, 왜 하는지, 그래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수원에 어떻게 그렇게 큰 규모의 오페라를 하겠어요. 수원 사람들이 오페라를 구경 안 했거든요. 500만원으로 어떻게 오페라 1억, 2억짜리를 하는가? 그때 지금도 유명한 박세은이나 김영미 등의 성악가들에게 전화를 해서 우리가 수원에서 오페라를 하는데 출연할 생각 없냐고 하니까 너무 행복해하는 거에요. 맨날 자신들이 요청해야 하는데, 지휘자가 오케스트라가 요청을 하니 좋아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다 150만원씩 주니까 450만원, 50만원 예비비. 그래서 오페라를 하기로 했는데, 그런데 저는 이 무대장치 할 예산이 당연히 없으니까 사무장에게 수원에 가구점 없냐고, 몇 개 있대요. 음악 좋아하는 사람이 한 사람 있다는 거에요. 찾아갔습니다. 이러한 아이디어로 우리가 시민들에게 오페라를 하려고 하는데, 당신 가구 좀 빌릴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좋은 생각이라고, 필요한 것 다 가지고 가라구. 그래서 내가 이거 이거, 요거, 저거 지적하니까 트럭으로 배달해 주었습니다.

 

오케스트라는 벽 뒤에 세우고, 1막, 2막, 3막이 있는데, 1막은 파티 장면이라 화려한 가구 소파를 놓고, 2막은 정원 장면이라 등나무 의자, 테이블, 가구점에 화초도 있어서 그것도 두고, 3막은 죽는 장면입니다. 폐병 걸려가지고. 그래서 침대, 거울 등을 놓고 장치를 했어요. 이제 라트라비아타는 주연이 세 사람입니다. 세 사람만 잘 하면 되요. 그래서 내가 그것을 스토리텔링을 하면서 하겠다.

 

제가 수원에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음악회를 자꾸하니까, 시장하고 도지사가 친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여기 옆에 아테네라는 양식점이 있었는데 30명 정도의 수원의 유지들, 전부 부부동반으로 60명, 그래서 이분들이 5시30분에 전부 만나서 식사를 합니다. 7시30분에 로얄석에 앉았어요. 1800석에 사람이 꽉 찬 거에요. 1년치 청중이 다 들어온 것이죠. 그래서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 500만원을 도에서 주었는데, 여러분에게 선물을 할라고 오페라를 하는 것입니다. 가구는 A라는 가구점에서 이렇게 도와주어 멋있죠. 1억 주어도 합판에다 색칠하는데, 저건 완제품이거든요. 조명을 받으니까 아주 돈을 들인 것처럼 보여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날 놀란 거에요. 정말, 제가 해설도 하면서, 합창이나 다른 것은 할 수 없으니까 진행을 그렇게 했는데, 로얄석에 앉은 사람들은 기립박수를 해요. 그 외의 청중들은 기립박수란 걸 해본 적이 없어 모르니까 그냥 앉아서 박수를 치고. 끝나고 이대로 갈 수 없다고 해서 다들 흥분해서 맥주를 마시면서 우리 수원 오케스트라를 위해서 연습실하고, 야외 음악당을 지읍시다란 이야기가 건전하게 나온 거였어요.

 

그런데, 시유지가 공청회를 하고 그랬는데 결국 도 문화예술회관이 여기면 여기 맞은편에 쓰레기 매립장이 있었습니다. 그 옆에 아파트 신도시였고. 저는 쓰레기 매립장 위치가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명이 힘을 모다 10억정도 모아졌는데, 딱 발동이 걸렸는데, 시장이 내무부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제가 재수가 좋은지, 이상용이라는 분이 후임으로 오셨는데, 이분이 굉장히 냉정하고 이지적인 사람이었어요. 활동에 대한 것만 보고만 받고, 말도 별로 없는 분이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삼성전자 단지의 책임 부사장쯤 만나서 이야기 하더니 결국 30억을 삼성전자에서 받아냈습니다. 여러명이 모아서 겨우 10억 될까 말까 했는데 삼성전자 한군데서 30억을 받아왔으니 대단한 사람이죠. 어쩔땐 말없는 사람이 일을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잔디밭에 무대를 만들고 뒤에 연습실을 놓고, 그리고 지을 때 저랑 엄청 삼성건설 팀장하고 부장들하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 사람들이 아파트는 지어봤지 홀은 안 지어봤어요. 지어주고 무조건 살아라가 아니라, 미리 짓기 전에,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색은 어떨까요. 그래서 이 건설하는 사람들도 특별한 건물에는 특별한 아이디어를 자신들이 배우니까 서로 스터디 하는 것이죠. 이야기 하니까 금선생님 참 재밌다면서 하는 거에요. 짓다보니 50억이 들었어요. 다 지었을 때 삼성에서 그런데 위에서 무대 가운데에 SS를 붙이면 안되겠냐, 그러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별로 안 좋을 것 같다. 그것은 당신들이 지어줬지만 이마에 붙여 두면 욕먹는다. 여기 땅위에 돌을 두고 돌에다가 삼성전자가 수원시에 기증했다고 하면 태풍에 다 날라가도 이것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우스워서 죽을라고 그래요. 지어주고 들어가면 된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지을 때 같이 대화하고 그런 느낌이 있으니까 저 사람에 대한 느낌이 있잖아요. 저 사람은 무조건 아니다가 아니라는 느낌. 그래서 그 의견이 받아들여졌어요.

 

그래서 개관을 했는데, 단원들이 악기만 들고 있어도, 아파트 사람들이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를 해요. 처음엔 왜 그런지 몰랐는데, 쓰레기 매립장이 잔디가 되니까, 아파트 값이 다 1000만원인가 오른 거에요. 사람들이 해피한 거에요. 고층에서 보면 잔디고, 거기서 음악이 나오니까요. 박수 안 치시네요.

 

다시 말씀 드리면 아까 500만원을 우리가 나누었으면 얼마 되겠습니까? 그런데 저희들이 예술가로서의 LOVE라고 할까요? 그런데 결국 시장이랑 지사가 흥분을 해서 맥주마시면서 이야기가 돌고 돌아서, 그 땅이 그 때만해도 2만평이 600억이었어요. 거기에 50억을 들여 지은거죠. 그 500만원이 돌고 돌아서 그 돈 이상으로 수원의 자랑이 된 거에요.

 

저는 수원 사람도 아니고, 고향도 아니고, 전 처가집도 수원도 아니고, 아무 관계가 없는 거에요. 수원이 뭐가 유명합니까? 하면 전부 갈비, 딸기 그러는 거에요. 왜 하필 자신이 사는 도시의 홍보를 그렇게 하는가? 아주대라고 학교가 좋은 것이 있다. 도서관이 큰 게 있어요 그래야지 왜 갈비로 하는가? 저는 수원이라는 곳이 음악의 도시가 되었으면 좋겠고, 제가 오케스트라가 자랑이다라고 하는 것이 더 멋있지 않는가? 그분들이 그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을 해서 음악당도 생겼죠. 수원 오케스트라와 처음에 연주 갔을 때는 우리나라 시장이 작아서 1년에 10번을 했는데 3년만에 45회, 나올 때는 60회까지 연주를 했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서 사람들이 오케스트라를 알게 되고, 수원이라는 곳을 알게 되도록 굉장히 노력을 했습니다.

 

, 청소년 음학회, 해설 음악회를 예술의 전당에서 요청이 왔습니다. 그 사람들은 외국의 유명한 오케스트라 돈 많이 주고 데려오는 것을 굉장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가에서 하라니까 청소년 음악회 1년에 몇번 하라고 한 것이죠. 그러나 저에게 제안이 왔을 때 저는 제가 기다렸던 것이니까 하겠다고 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82년도에 오케스트라를 처음으로 청와대에 불렀어요. 청와대에서 연주를 했는데,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열심히 하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정말 열심히 하는 거에요. 무대 위에서 조명이 비치면 열심히 하고 밑에 가면 안 하듯이 청와대 가면 열심히 하고, 청소년이나 군산에 가서 하면 대강합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줄이면 안 될까 싶어서, 여러분 나는 이것이 꺼꾸로 되어야 한다. 대통령은 잘 해도 못 해도 그 사람은 모른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아서, 음악회가 좋으면 음악을 좋아하는 계기가 되는 것인데 그것을 대강해주면 안 된다. 단원들이 말 되네 싶어서 따라주었습니다.

 

어쨌든, 94년부터 6~7년 동안 매 10회의 연주를 했는데, 전부 매진했습니다. 영화관에는 표사고 들어가는데 어른들은 전부 초대, 공짜표입니다. 어른을 고치기는 시간이 걸리니까 애들이 표를 사는 연습을 시키려고 2000원을 했더니 유료표가 매진이 된 것입니다. 아이들을 어떻게 흥미롭게 할까 제가 연구를 엄청 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결과를 냈습니다.

 

제가 KBS 12년, 수원에 7년, 그런데 운명이 어떻게 되었냐면, 제가 국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되었는데, 오케스트라가 안 오게 되는 바람에, 제가 유럽에 있는 친구들을 한 50명 초대했습니다. 한국의 악장 수석을 또 모아서 50명, 100명을 모아서 이름을 적당히 하다보니 유라시안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국제음악회 연주를 하니까 그림이 멋있어요. 그런데 1주일 연습 끝나고 다 헤어지는 것이죠. 이 이름을 제가 만든 것이니까 이 이름을 가지고 제 오케스트라를 가져야겠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유라시안 오케스트라를 2000년대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지금 5년째인데, 이것이 예산이 없지 않습니까? 한푼도 없이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제가 돈키호테라는 말을 했지 않습니까? 그냥 시작했어요. 제가 포스코에 강당이 400석이 있는데, 그곳에서 우리가 연습을 할 수 있을까 해서 갔습니다. 강당이 참 잘 지어졌는데, 매일 세미나랑 영화도 돌려서 쉴 시간이 없다는 거에요. 그런데 거기 가보시면 로비가 7층이거든요. 제 눈에는 유리로 된 성당으로 보였어요. 그래서 제 생각에 우리가 저기서 연주를 하면 어떨까요 그랬더니 그것은 흥미로운 제안입니다. 그래요. 포스코가 민영화를 하면서 이미지를 바꾸려고 옛날에는 CF를 하더라도 불 튀기는 그런 걸 했는데 요즘은 소리도 없이.. 그러잖아요. 바뀌는 찰나에 로비에서 음악을 하는 것이 맞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희들이 1999년 12월 31일 밤 10시 30분에 음악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라는 것이 70분 걸리는데 1, 2, 3악장을 딱 하니까 새천년이 30초가 남았습니다. 물론 제가 계산을 했죠. 그 때쯤 끝나야 한다. 조금 기다리니 새천년의 종이 울리고, 4악장이 20분이 걸리는데, 그렇게 딱 끝나니까 로비 의자가 1000석이에요. 기립박수 받았습니다. 흥분, 무언가 뭉클한 순간이었죠. 성공인 것이죠.

 

3일 후에 제가 다시 가서 어땠냐고 했더니, 금선생, 너무 좋았습니다. 기립박수 보시지 않았습니까? 이유라는 것은 새천년이 되었다는 것, 로비에서 1000석을 놓고 기립박수를 했다는 것,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연주가 좋았다는 것.

 

우리 예술가들은 연주가 끝났을 때 박수를 좋아하고, 제일 듣고 싶은 것은 수고했습니다가 아닙니다. 다음 연주 언제 잡을까요?입니다. 음악을 들으러 온 분은 그렇지만 음악가들, 매니저, 프로모터들은 다르죠. 연주 끝나고 제가 그랬습니다. 내 생각에는요. 베토벤이 교향곡을 9개를 썼거든요? 그거 어때요? 9개를 다 하면 그것은 또 대단한 새로운 시작일 것 같습니다. 하나의 성공은 또 다른 성공을 유혹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9개를 그곳에서 하기로 했는데, 다음날 전화가 왔어요. 이게요. 서울에서만 9번 하면 광양하고 포항은 짜증낼 것 같습니다. 광양도 2번, 포항도 2번 해서 총 13번을 계약하겠습니다가 된 것이죠. 저희로서는 하나의 스타트가 잘 된 것이죠. 그리고 포항도 우리도 다 들어야겠다고 해서 다 들었습니다. 저희가 계약을 하면 불량품을 보내면 안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계약을 했을 때 우리가 더 잘해야겠다고 해서 매번 연주 때마다 더 열심히 했습니다. 기업하는 사람들은 돈 주고 괜찮다는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앙케이트를 돌려서 괜찮더냐, 무엇이 더 필요하냐, 의자가 불편하다고 하면 더 좋은 의자로, 연주가 나쁘다고 하면, 그건 안 돼죠. 결국 저희가 매년 포스코에서 6번 2달에 1번, 그 사이는 하루는 국악, 뮤지컬, 재즈 등의 다른 분야가 들어가고 우리는 심포니 6개를 했습니다. 그래서 베토벤이 끝난 후에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개를 했고, 브람스 교향곡 4개와 협주곡 6개를 했구요. 올해는 드볼작 심포니, 멘델슨 해서 6개를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베토벤 9 심포니 때문에 50회의 연주를 매년 10회씩 해오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조사를 해보니까 청중이 1000석이니까, 인터넷으로 3000~4000명이 신청을 하면 추첨을 해서 600석을 초대 400석을 하고. 그리고 아이들은 못 옵니다. 정숙하게 하기 위해서. 어느 예술의 전당 사람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사람들입니다. 또한 대중적인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 심포니입니다. 그러니 그 수준이 엄청 높습니다. 

 

포스코는 그랬고, 어떻게 돈 없이 시작했는데 되었는가? 2000년 1월 15일날 삼성전자가 신년음악회를 하겠답니다. 그래서 제가 연주를 하겠다고, 옛날의 삼성과의 관계가 있어서 하겠다고, 그런데 퍼퓰러한 것을 해주면 안 되겠는가. 임원들이 다 오는데 손님은 2300석이고 PAVV 텔레비를 구입한 사람이랍니다. 그래서 저는 일부는 해설이 있는 오페라 하이라이트를 하고 일부는 베토벤 5번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중간의 에이전시에서 이러면 자기 다음에 일 못 하는데, 쉬운 것 하면 안 되겠냐고, 그래서 내가 당신 안 쫓겨나게 할 테니까, 시키는대로 하십시오. 그래서 했습니다. 그리고 PAVV정도 산 사람이 베토벤 5번은 들어야지 하면서 이야기를 했죠. 일부는 해설을 하면서 하고, 2부에는 베토벤 심포니를 했는데, 우리 단원들이 열심히 했을 것 아닙니까? 끝나고 로비에서 리셉션을 합니다. 샴페인이 나오는데, 저도 지휘자니까 할 수 없이 서 있으니 그날따라 윤종명 부회장이 나왔고, 사장도 많고 임원도 많잖아요? 그날따라 30~40명이 있었어요. 윤부회장이, 금선생, 수원이 아니라 유라시안 언제 만들었습니까?, 몇 개월 전에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패기가 넘치고 연주가 좋네요., 그런데 그런 것은 괜히 하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그날따라 샴페인을 많이 마셨거든요. 그래서 기분이 좋았고, 많은 사람 앞에서 제가 샴페인 때문에 힘이 났는지, , 감사합니다. 그런데 삼성전자 같은 곳에서 우리를 2억씩 2년만 도와주면 우리가 2년 안에 베스트가 될 수 있겠는데요? 이랬어요. 그러니까 완전히 리셉션장이 썰렁하게 된 거에요. 공개적으로 사람 있는 곳에서 돈 이야기를 하니 난리가 난 거에요. 그런데 그 순간 저도 이게 샴페인이 깬거죠. 그래서 제가 문득 이랬어요. 아 그런데 그것이 거짓말이면, 그 돈 돌려 드리죠. 그랬어요. 아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네요. 적어도 그 정도의 배포는 있어야지요. 거짓말이면 돌려주겠다고 하니 전부 웃음바다로 변한 거에요. 전부 당했다, 웃겼다, 하면서 뭐 좀 도와야겠네, 재밌네 하면서 그런대로 넘어갔어요.

 

결국은 그 이야기가 씨앗이 되어 삼성전자가 2억씩 3년을 주는 것으로 계약이 되었어요. 그 2억 주는 것도 어떻게 5개월이나 걸리는지 계약을 하는데 이사가 금선생, 아예 6억을 달라던지 10억을 달라고 하지, 왜 2억씩 3년이냐. 그래서 삼성이니까 3년이지, 그러면서 우리 오케스트라가 클려면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한번에 6억을 주면 자신들의 기대치가 6억이 될 것 아닙니까? 돈이 필요하지만 많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3년을 하면 우리가 시간을 벌 수 있다고 하니까. 그렇게 해서 3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단원들에게 우리는 거지라 아니라고 했어요. 삼성으로서는 큰 돈이 아니고 하잘 것 없겠지만 우리는 이 돈의 가치를 새롭게 해야 한다.

 

결국 신입사원 삼성전자가 2500명 정도 들어오면 그 친구를 전부 400명씩 6주 훈련을 합니다. 피닉스 호텔에서 나중에 만나서 오케스트라가 이런 홀에서 15명 단원을 데리고 가서 젊은 신입사원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삼성이 넥타이 매고, 초일류기업하는데, 여러분들도 다 공부 잘해서 뽑힌 모양인데, 여기 음악회 안 가본 사람 손 들어 보라고. 그럼 반이 안 가본 거에요. 여러분들 행운아인줄 알라고, 내가 다음부터 음악회 안 간 사람 절대 뽑지 않도록 하겠다고. 오늘 음악회를 듣는 것으로 음악회 본 것으로 하겠다. 음악에 대한 머리들이 비슷하잖아요. 그럼 해설하기가 쉬운 거에요. 다 졸업하고 바로 오니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하니 쉽다는 것이죠. 그렇게 하니 이 사람들이 설문조사에 답하기를 금난새가 인상적이었다가 많았어요. 삼성은 그것을 다 정리를 해보니까 이것이 엄청 반응이 좋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앞으로 삼성이 전자, 전자 하는데, 앞으로는 환타지가 있어야 한다. 넥타이 매고 깨끗한 것만 삼성이라면 이젠 벗어나서 해야 한다. 이렇게 저 나름대로 짧게나마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결국 삼성에서는 돈 주었는데 꺼꾸로 우리가 돌려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작년에는 이건희 회장이 자기 신년 음악회를 CEO 한 100명하고 자신하고 음악회를 하는데, 말단이 다 들었다는데, 우리도 들어보자였던 것 같아요. 여러분도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건희 회장이 웃는 얼굴이 아닙니다. 그런데 연주를 딱 1시간을 하기를 원하는 거에요.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근데, 이분이 첫 곡 딱 끝나고 웃기 시작해서 1시간 내내 웃었어요. 처음엔 부인이 일어나게 해서 기립박수를 했는데, 그 다음엔 본인이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했어요. 모 이회장이 일어나니 다른 CEO들도 다 기립박수를 하는 거죠. 그리고 이 회장이 그렇게 1시간 내내 해피하게 웃은 적이 없답니다. 기업이 그런 정보가 돌아서 신입사원이 들으니, 나도 들어보고, 유라시안은 어떤 것인지 들어봐야겠다고 해서 들은 건데, 그것이 반응이 엄청 좋았어요. 그래서 3년 계약이 끝났는데 연장이 되었습니다.

 

제가 시작할 때, CJ라는 기업의 회장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모르지만, 세종회관의 청소년 음악회 시리즈를 한다는데 스폰서 할 생각이 없습니까? 했더니 좋은 것 같은데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더니 1달이 지나도록 답이 없는거에요. 그러니까 관심이 없나보다 하고 끝났는데, 1년 반이 지나서 TV녹화를 해달라고 해서 할 수 없이 12월 30일 시간이 나니 하겠다고 했어요. 조그만 홀에서 지휘도 아니라 연주를 했습니다. 연주 딱 끝나니까 CJ회장이 거기 또 있었어요. 그래서 차 한잔 하면 안 될까해서 하겠다고 했죠. 자신이 1년 반 동안 봐 왔는데, 유라시안을 지원하고 싶다. 이거에요. 너무 놀랜 것 아닙니까? 제가 요청한 것도 벌써 이미 끝났고. 그 때 당황하면 안되겠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냉정하게 생각했어요. 그럼 어떻게? 했더니 굉장히 적극적으로 하시는거에요. 시범 케이스로 5억씩 2년 하면 어떨까요?, 그럽시다.

 

그 다음날 만나서 냉정하게, 너무 이래라, 저래라 안 하면 안 되겠냐고, 주는데 내가 알아서 당신들이 돈 아깝지 않게 생각하게 하겠다고 그랬는데, 다행히 그래봅시다. 2년 후에 그게 속았다 하면 끝나는 것 아니냐. 그래서 그러자. 예술계에서는 큰 돈이기 때문에 화제가 되었어요.

 

그런데, 저희가 그것을 다 어떻게 썼는가란 말을 오늘 하지 않구요. 이것이 끝이 되겠는데. 유라시안이 여름에 창원에 연주를 매년 갔어요. 창원 연주가 금요일인데, 하루는 해군 사관 학교에서 전화가 온 거에요. 우리 생도들을 위해 음악 강의를 한번 해주면 안 되겠냐. 그래서 조금 생각해보고, 강의가 아니라 해군 학교에 우리 오케스트라가 간다고 하라고 그랬어요. 그러니 해군 사관학교가 발칵 뒤집어 진거에요. 겨우 돈 마련해서 강의를 들을라고 했더니 오케스트라가 온다니까 어떻게 된 것이냐. 그래서 제가 CJ에게 우리가 가는데 경비가 들 것 아닙니까? 그것을 CJ돈으로 한다고 했죠. 그래서 제가 금요일에 연주하고 토요일 아침에 생도들이 앉아 있고, 거기에 제가 음악에 대해 음악은 이렇게 생겼고, 이렇게 구성이 된다. 어떠냐 느낌이. 그랬더니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에요. 교장이 너무 감사합니다. 그렇게 된 거에요.

 

다 끝나고 그 다음 날인가 육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사관학교면 육사인데 어떻게 먼저 해사를 갔는가. 뭐 그렇게 화내실 것 없이 우리 가면 안 되냐. 그래서 갈 날자를 잡고 났더니 공사에서 전화가 오는 거에요. 우리 생도들은 더 엘리트다. 기계를 만지고, 정신 집중하고, 책 많이 읽어야 하고, 엘리트는 공군이다. 그래서 엘리트고 뭐고, 하여튼 원하면 우리가 가겠다. 그러면 CJ는 카메라를 들고 와서 찍어서 사방송으로 보내서 우리가 이런 좋은 일을 했다. 또 음악만 아니라 해설을 하니까 그것이 교육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전 3군 사관생을 가르쳤는데, 재미 없으면 더 안할라고 할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할 수 없이 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가니까, 매년 와야 한다고 된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국방부 장관님에게 그 소식이 들어간 거에요. 우리 육본에 건물이 하나 섰는데 400석인데, 어떻게 하는 것인데 우리도 봐야겠다. 그래서 가서 연주를 했어요. 밑에 장교가 될 사람들이 보는 것을 우리도 봐야겠다고 해서 봤어요. 결국 군대가 변하고 있습니다. 군대가 태권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 책을 많이 읽어야 하고, 음악도 알아야 리더지 않겠냐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군대는 변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CJ는 자신이 준 돈이 좋은 일에 쓰게 된 것이고. 저는 몰랐는데 CJ가 군에다가 자신들이 만든 제품을 납품하는 것 같아요. 돈봉투가 필요 없죠. 좋은 일로, 기업이 문화, 문화가 기여를 하니 자연스럽게 비즈니스가 이뤄진 것이 아닐가?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저희 유라시안이 첫해는 40회, 둘째는 60회, 75회, 작년엔 87회, 올해는 100회입니다. 지금 KBS 교향악단이 60회 합니다. 서울시에선 50회 합니다. 거기는 단원이 100명입니다. 돈도 나라에서 몇십억씩 주고 있습니다. 저희는 한 푼도 없이 시작한 오케스트라인데 100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청중의 수도 우리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청중을 다 기록합니다. 2주 전에 포천이라는 곳에 공연을 갔습니다. 언덕에 1000석이 지어졌는데 표가 다 매진되었습니다. 그럼 우리가 연주한 것이 경기병 서곡이냐, 아닙니다. 베토벤 교향곡 7번을 했는데, 유료로 15000원, 20000원이 매진이 되었습니다. 어느 오케스트라도 그런 일을 하고 있지 않은데, 우리는 작년에도 그렇고 25도시를 공연을 갔습니다. 우리만큼 많은 도시를 가고, 많은 청중을 만나는 오케스트라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 재산이 없이 시작했지만 이렇게 했다는 것에 대해서 음악계에서 생각을 달리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2년 전부터 앙콜하고 나가면, 지휘자가 나가면 박수가 그쳐요. 그럼 오케스트라는 박수도 없이 걸어나가는 것입니다. 제가 그 상황에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나만 박수를 받게 되잖아요. 물론 제가 대표로 받지만요. 그래서 앙콜하기 전에, 저희 유라시안은 새로운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지휘자가 가장 나중에 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만히 서 있으면, 단원들이 서로 악수하고 나갑니다. 박수 계속됩니다. 그럼 제가 뚜벅뚜벅 걸어 나갑니다. 멋있는 아이디어 아닙니까?

 

저의 직업은 여러분들 CEO고 집에서도 그렇고 리더면, 아무래도 잔소리를 해야 하고, 요구가 많은 입장이겠죠. 요구를 하는 입장이지만, 요구를 받는 입장을 생각해보면, 실지로 속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저 사람은 좋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보이지 않게 쌓인다는 것이죠. 그런데 내 쪽에서 박수지만 배려를 했을 때, 저 사람은 조금 다르네, 다른 생각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따라오고 끌어가는 입장이 아니라,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것을 이론적으로 왜 모르겠어요. 그 이론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하다보니 그 아이디어 하나가, 단원들에게 뭔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끝으로 공군사관학교 마지막 공연에 베토벤 8번을 연주했어요. 앙콜을 하나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희 오케스트라는 지휘자가 맨 나중에 나가게 되어있습니다. 참고하세요. 그랬더니 그리고 앙콜한다고 가만히 서있었어요. 단원들이 다 나갔고, 마지막이라 인사를 하고 나갔어요. 나갔는데 박수가 안 그치는 거에요. 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무대에 아무도 없는데, 이 사람들이 박수를 안 그치는 거에요. 그 때, 제가 뭐가 지원이냐, 스폰서냐라는 것을 생각했어요. 할 수 없이 다시 나와서 인사하고 들어갔어요. 아까 우리는 삼성에서 받는 돈도 중요하고, CJ돈도 중요하고 하지만, 단원들이 필요한 것은 우리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박수가 필요한 거거든요. 내가 요구를 했다고 해서 그 요구만큼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정말 그 말을 알고 격려를 할 때 대한민국은 희망적이지 않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저런 지원이다. 저런 지원이 있는 한, 좋은 오케스트라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오케스트라가 되어야겠고, 될 수 있겠다는 환타지를, 감동의 순간을 받았습니다.

 

오늘 제가 자랑한 이야기는 양해하시고, 그 뒤에 있는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일까. 상대를 배려하는, 누가 나에게 어떻게 해줄까가 아니라, 내가 이 사회를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오늘 오면서도 엉뚱한 것인데 경제가 10000불인데 20000불이 언제 되는가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거꾸로 생각합니다. 우리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용기를 주어서 10000불이 20000불이 될 수 있게 할까? 착각일까요? 그런 생각 해도 될까요?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예정 연구원 yjlee@ip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