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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영자독서모임으로의 초대32: 한국의 정체성
발간일 첨부파일

한국의 정체성/저자: 탁석산

탁석산이라고 합니다. ‘한국의 정체성’을 쓴 것은 4년 전 일이고, ‘철학 읽어주는 남자’ 등을 썼구요. 이번 주에 ‘한국의 민족주의를 말한다’라는 책을 출간하려고 합니다. 오늘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한국의 정체성, 이런 어려운 문제가 아니고,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를 말씀 드릴까 합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요즘 한국사회의 가장 큰 이슈인데, 한국을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가, 현재에 있어서는 민족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 모든 정책은 도덕, 정당성, 정의에 투자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민족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독도문제, 고구려사 문제, 그리고 요즘 왜곡의 문제, 자주파, 동맹파의 논쟁 밑바닥에는 민족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자주파라는 것은 민족의 자주를 말하는 것이죠. 고구려사도 민족을 되찾자는 것이고 독도 문제도 민족의 문제입니다. 제 생각에는 한국사회의 가장 큰 이슈이고 밑바닥에 깔려 있는 문제는 민족주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족주의라는 것은 대단히 위험스럽고 대단히 유용하기도 한 이중적인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말씀 드릴까 합니다. 원래 철학자들이 영양가가 없어요. 제가 회원명단을 보니 굉장히 영양가 있는 분들이 많으시더라구요. 저는 계속 백수로 살았고 직장생활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가끔 철학이 영양가가 있을 때가 있어요. 무언가 혼란스럽고 혼돈스러울 때 문제가 무엇인가, 백수들이 주로 이런 것을 봐요. 저는 언제나 한가하거든요. 뒹굴다 보면 문제가 보일 때가 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민족주의적인 문제라고 보는 것이죠.

우선은 우리나라 민족주의 장래를 볼 때, 저는 비관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이런 강의에 어울리지 않죠. 제가 한국에 대해 비관론자이기 때문에 강의가 효과가 없다는 거예요. 보통 이런 강의는 한국이 발전할 것이다, 우리 민족이 훌륭하다, 이런 얘기를 해야 본전도 뽑고, 사교가 되는 것인데, 강사가 나와서 한국이 앞으로 어려울 것이라고 하면 기분이 나쁘죠, 다신 안 불러요. 제가 방송에 나가서 몇 번 했더니 출연도 안 시켜줘요. 요즘은 제가 안 한다 그래요. 왜냐면 나오면 맨날 편집 당하고 인터넷에 나쁜 놈이라고 몇 백 개씩 떠요. 너무 시달리니까 귀찮죠. 저는 ‘한국이 길게 잡아 7년 내로 현지 고용인으로 전락할 것이다’라고 보고 있습니다.

여기는 현업에 있으니 피부로 느끼실 텐데, 현재 우리나라 금융자본은 이미 외국이 장악하고 있지 않습니까? 5년 정도 지나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 같아요. 정부기관을 제외한 모든 기관산업과 중요산업은 외국인이 장악할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이 직접 경영하진 않을 거예요. 그런 시대는 아니니까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나라에서는 서울대를 나와도 졸업한 후에는 모두가 외국인 회사를 다니는 거죠. 국민은행도 외국은행이잖아요. 말만 국민이지, 제일, 외환은행도 마찬가지요. 최근에 외환은행을 인수한 펀드가 극동건설을 인수했고, 경영을 시작했잖아요? 그런 것은 시작이라고 봐요. 이것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추세거든요? 이런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몇 나라밖에 없어요. 우리나라도 제 생각에는 5~7년 이내에 모든 사람이 현지 고용인이 될 것이라고 봐요. 여러분들 중 상당 %가 이미 현지 고용인일 거예요. 은행장이 외국인이지만, 그래도 나는 한국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착각을 만드는 시스템이 있어요. 이것이 현지 고용인의 비애인데, 이러한 비애를 느낄 틈이 없어요. 물질적 보상 때문에.. 일반적인 조그만 기업들은 그럴 일이 없겠지만, 주요한 기업들은 외국인이 장악할 것이다. SK의 소버린같은 경우, 소버린은 투기를 목적으로 하는 펀드는 아니라고 알고 있어요. 결국은 장기적으로 기업을 깨끗하게 만들어서 되파는 펀드라는 것이죠. 여전히 외국인이 지배하는 문제는 변하지 않는 것이죠.

우리나라의 비극이 무엇이냐 하면, 사교육비를 어렸을 때부터 엄청나게 투자해서 대학을 보내고, 자비로 외국까지 유학을 시켜서, 결국은 외국인 회사의 현지 고용인으로 취직을 하는 것이죠. 외국인들은 따로 투자를 안 해도, 우리 스스로 현지 고용인으로 취직하는 것이죠. 이런 좋은 장사가 없잖아요. 여기에 투자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봐요. 제가 생각하기에 저희 애가 고3인데, 공부를 잘하면 기업에 들어가 현지고용인이 되고, 공부를 못하면 백수가 되고, 인생이 사나우면 노숙자가 되는 것이겠죠. 제가 보기엔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현지 고용인의 위험은 없다라고 보고 있죠. 우리 애가 애국자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앞으로는 현지 고용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간의 계급 차가 굉장히 날 거예요. 그래서 그것에 대한 동물적 후각이 여자들에게 있어요. 남자들은 제가 대체적으로 경험해 보니 멍청하거든요. 후각이 없어요. 정세를 읽을 줄을 몰라요. 여자들은 동물적으로 알거든요. 그래서 영어교육을 하는 거예요. 현지 교육의 시대가 온다. 여자들이 애들을 붙잡고 영어를 죽어라 가르쳐요. 그런데, 남자는 다 똑같아요. 우리말을 가르쳐야지 애들한테 영어를 가르치냐, 우리말을 하고,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 여자들은 참고 안 해요. 무조건 영어를 가르쳐요. 유학도 보내요. 결국은 그런 애들이 현지 고용인들 중에 출세할 거예요. 영어를 안 배우거나 못 배우거나 하면 현지고용인보다 낮은 직급에 속하겠죠. 그런데 영어만 배우면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독어나 불어, 일어는 필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독어, 불어는 원래 필요 없는 언어였고, 중국어도 필요 없죠. 중국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다 영어 잘하잖아요. 인천에서 보따리 장사하는 사람은 중국어를 해야 해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알 필요 없다는 거죠.

제가 보기에는 비극적인 시나리오를 우리 나라가 갖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비극적이지만, 개개인으로 보자면 행복한 시나리오예요. 왜냐면 우리나라 서민들은 더 생활이 향상될 것이라고 봐요. 외국 자본이 지배하는 한 우리나라 노조나 그런 문제는 앞으로 없어질 거예요. 제가 보기에 일반 서민들의 생활은 행복해질 거라고 봐요. 왜냐면 현지 고용인은 행복해요.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앞으로 정치는 제가 보기엔 무력화될 거예요. 우리나라 정치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요. 돈 줄을 외국인이 쥐고 있으면 정책결정 해봐야 소용이 없거든요. 앞으로는 외국인하고 타협을 하겠죠. 그런데 이런 것이 앞으로 제가 보기에는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이것이 어떤 반등을 가져 오냐면, 민족주의라는 반등을 갖고 올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현지 고용인으로 전락하면 할수록 우리의 민족주의가 강화되어 균형을 맞춘다는 것이죠. 자신의 신분이 무력화되는 것을 깨달을수록 내면의 민족주의가 강화될 것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나라의 이러한 현상은 심상치 않은 거예요. 우리나라의 민족주의는 매우 강렬한 형태로 표출되고 있거든요. 이것이 뜻하는 것은 그만큼 현지고용인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증거이죠. 이것을 애들도 느끼고 여러분도 느끼시죠. 그런데 현지고용인으로서 최상층은 덜 느껴요. 불편한 것이 없으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느끼거든요. 자신이 외국인 회사에 다니지만 집에 오거나 신문을 볼 때는 민족주의자로 변신해요. 독도문제 나오면 난리가 나죠. 독도가 일본 것일 수도 있다고 하면 난리나요. 인터넷에서 서버가 다운이 되요. 아마 제 생각에는 다음 기에 이 강좌에서 고구려사를 할 것 같아요. 강의 내용은 고구려를 지켜야 우리민족을 지키는 것이라는 감동적인 강의를 하겠죠. 그런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거에요.

벌써 내용이 삐딱하지 않아요? 제가 소수 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학에서 교수를 못해요. 교수랑은 워낙 사이가 안 좋고, 방송국에서도 싫어해요. 제가 유일하게 글을 쓸 수 있는 곳이 단행본이에요. 제가 6개월씩 컬럼을 연재해보았는데 비난이 장난이 아니에요. 그래서 저는 단행본이 제일 편해요. 여러분도 들어서 느끼셨겠지만 삐딱하잖아요. 이상한 이야기 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니까. 그래서 저를 부른 것에 대해서 저도 의아하게 생각을 해요. 저를 선정한 사람이 아마 문책을 받을 거예요. 다시는 부르지 말아라. 상관 없어요.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지 강연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책 안 팔려요.

제가 여태까지 4권을 썼는데 인문학 책으로는 많이 팔렸어요. 적어도 20,000권씩은 팔렸거든요. 인문학에서는 베스트셀러 작가예요. 저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출판사 사장들이에요. 왜냐면 이 놈이 욕을 먹지만 책은 팔린다는 것이죠. 나머지 사람들은 다 싫어해요. 여러분들도 이런 사람이 있다고, 거의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들으시면 되요.

고구려사 이런 것이 갑자기 부각되는 것은 우리가 현지고용인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왜냐면, 고구려사는 역사의 문제예요. 이것을 현실의 문제로 끌어들이면 영토분쟁이 되는 것이거든요. 외교문제거든요. 영토분쟁은 결국 전쟁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전쟁하자는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중국이랑 전쟁을 할 능력이 없어요. 중국이랑 전쟁하면 지죠. 중국도 알고 있죠. 우리도 알고 다 알아요. 역사는 소유의 개념이 아니에요.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쓴 거죠. 고구려가 과거에 있었다는 것인데, 그것이 누구의 소유냐는 주장하기 나름이에요. 그런데 땅은 다른 문제죠. 지금 만주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중국 땅이거든요.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만주를 회복하자고 가면 전쟁이거든요.

지금 고구려사를 향한 움직임은 무엇을 겨냥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아요. 영토분쟁을 겨냥한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죠. 고구려사를 우리의 역사로 하자. 이것은 중국도, 일본도 안 말려요. 역사는 쓰기 나름이니까요. 고구려는 1300년 전에 멸망한 나라예요. 그것을 중국이 중국사로 쓰겠다고 하면 쓰라고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고구려 역사에 대해서 중국이 쓰면 안 된다는 것이죠. 굉장히 이상한 주장이에요. 중국 사람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고, 세계 학계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에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만 고구려 역사가 우리 역사가 아니면 민족의 역사가 없어지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죠. 굉장히 이상한 주장이죠.

원래 민족이라는 말은 우리 역사에 없었던 말이에요. 굉장히 민족이라는 말이 오래된 말 같은데 이 말은 19C 말에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이에요. 번역어거든요. 그런데 일본이 근대국가를 건설하면서 민족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이고 그 말이 한국과 중국으로 수출된 것이죠. 민족이라는 말을 우리가 쓰기 시작한 것은 100년 남짓해요.

5개 정도의 단계가 있는데요. 1894년부터 1905년까지가 한 단계에요. 민족이라는 말은 처음에 1905년경 생겨나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되어 나라를 잃었다라고 역사책에 나오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사실과 매우 다른 거에요. 이미 1905년도의 교과서를 보면 태극기와 일장기가 동시에 나와요. 1910년을 기점을 일장기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1905년에 이미 일본국기가 한국국기와 똑같이 나와요.

(표)

1905년까지 한국사람은 한국도 근대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독립신문도 만들고 활동을 했던 거죠. 그런데 1905년에 와서는 사람들이 그런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요. 그래서 1905년부터 민족이라는 말이 한국 무대에 나타나게 되요. 그전에 독립신문 등 여러 신문에서 민족이라는 말이 일절 등장하지 않아요. 그런데 1905년부터 이제 독립국가라는 말은 사라지고 민족이라는 말이 등장해요. 이 시기가 중요한 시기에요. 이 두 번째 시기, 5년간의 시기 동안 민족이라는 말이 한국 신문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되요. 그대신 국가가 약화되요. 민족과 국가라는 두 가지 개념이 있는데, 국가 형성의 희망이 없으니까 민족 개념이 등장해요.

이것이 가장 위협을 발휘하게 되는데, 이 2단계의 민족개념은 지금과 매우 흡사해요. 광개토 대왕비를 중국이 못 찍게 한다. 사진도 못 찍게 한다. 나쁜 놈들. 그런데 나쁜 것 하나도 없어요. 중국 유물이거든요. 중국 사람이 알아서 하는 것이지 우리가 소관할 것이 아니에요. 우리나라에 중국 유물이 있으면 우리가 보관 하는 것이지 중국 사람이 뭐라고 할 것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지금 고구려 열풍에 휩싸였던 것처럼 1905년에서 1910년 시기에도 똑같아요. 신문에 심지어 고구려 시가 나와요. ‘저 잃어버렸던 만주 벌판을 찾자. 거기로 달려나가자’ 이런 이야기가 계속 등장해요. 그런데 신라, 백제는 등장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1905년에서 1910년에 사이에는 국가를 잃어가는 시기였기 때문에 남성적인 이미지의 국가관이 필요해요. 백제, 신라는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죠. 그래서 이 5년 사이에는 고구려가 민족의 담론을 지배해요. 여러분이 아주 쉽게 이를 검색해 볼 수 있어요. 요즘 서울신문이라고 이름 바꾼 신문에 들어가서 고구려를 치면 다 나와요. 이미지의 요체는 남성적 이미지, 정복이죠. 일본이 우리를 정복해오기 때문에 우리도 정복국가 이미지가 필요했던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정복할 힘이 없어요. 찾으려니까 고려, 백제, 신라 아니죠. 그러니까 고구려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5년 동안 고구려의 이미지가 확대 재생산되었죠. 가장 민족주의가 극성을 부렸던 때고, 거꾸로는 이 때가 국가가 가장 약화되었던 때라는 것이죠.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된 후에는 민족이라는 것이 자리를 잡아요. 국가가 완전히 소멸했죠. 1905년에서 1910년까지 근대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어요. 이 목표는 전세계가 똑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어요. 똑같이 근대화를 했고, 민족국가를 만든 거에요. ‘근대민족국가’에서 ‘국가’ 건설은 실패했죠. 그리고 남은 것이 ‘근대’와 ‘민족’이죠. 그런데 근대는 한국에서 일본이 근대화를 이루어 나갔죠. 이것이 요즘 역사학계에서 말하는 근대화 기여론이라는 것이죠.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일본이 이야기 하잖아요. 최대 과제가 ‘근대민족국가’인데, 국가 건설은 실패했지만 ‘근대’와 ‘민족’은 남아 있다가 ‘근대’는 식민지 지배 하에서 진행이 되었어요. 서울역 보시면 옆에 요즘 신역사 마련되었죠. 이것이 굉장한 의미가 있는 거에요. 1920년대 경성 역의 위용은 대단한 것이었거든요. 한국에 그렇게 멋있는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문화의 충격이었죠. 사람들이 이것을 보러 다 나왔었다는 것이죠. 소설가 이상도 거기 카페에 하루종일 앉아 있었다는 것이죠. 근대화의 충격 때문이죠. 이런 것들이 일본 통치하에 근대화가 진행이 되었던 것이고, 한국 사람들이 이것을 받아 들였어요. 편리하고 좋고, 그것도 목표였으니까.

그래서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민족국가를 동시에 건설해야 되겠다는 염원이 있었죠. 그런데 민족국가 건설은 이루어질 수가 없잖아요. 국가건설이 안 되니까. 그래서 민족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내면화 되기 시작했어요. 밖으로 표출이 안 되니까, 민족이 밖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내면화되어 있는 시기였어요. 이것이 어떤 다른 점이 있냐 하면 1905년에서 1910년까지는 남성의 이미지의 민족이었다면 1910년에서 1945년까지는 여성의 이미지였죠. 그리고 ‘한국인의 정서가 한이다’ 라는 주장이 이때 나오게 된 것이죠. 1910년 이전에는 한국민의 정서가 한이라는 것이 나온 적이 없어요. 조선시대에도 나온 적이 없었죠. 그런데 1910년에서 1945년 사이에는 한국민의 정서가 한이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었죠. 민족이 여성화되고, 김소월이라는 시인이 나오기 시작하고 반응을 불러 일으켰죠. 일제시대 때 고구려를 외치는 것은 이상한 것이죠. 고구려는 남성적 이미지의 정복국가인데 이러면 잡혀가요. 그래서 민족을 잃은 한을 담은 것, 여성화된 이미지죠.

민족이라는 이미지가 내면화되었었는데 1945년에 해방이 되고 다시 문제가 불거진 것이죠. ‘근대민족국가’ 건설이 미완의 과제였기 때문에 다시 솟아 올랐죠. 근대화는 일본에 의해서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이죠. 그러면 민족국가만 이루면 되는데, 남북으로 갈라지고 분단이 되어서 민족의 문제가 다시 들어가게 되요. 1945년에서 1990년까지는 민족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체제경쟁이 중요한 문제였죠. 이념의 체제경쟁이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남북한이 누가 더 잘 살고, 효율적으로 국가를 통치하는가의 체제경쟁을 했었는데 1990년쯤에 소련이 무너지면서 체제경쟁이 끝났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시작했죠.

1990년대부터는 이 해묵었던 과제가 다시 등장했어요. 이때는 ‘근대민족국가’에서 ‘근대’는 없어지고, 왜냐면 근대화가 되었잖아요, 근대화 문제는 더 이상 남북한에 없고 국가 문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왜냐면 남북한 모두 공히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어요. 그래서 남은 것이 민족문제이죠. 이것이 1990년 이후에 떠올라요. 이 기류를 잘 잡은 사람이 선거에서 성공한 거예요. 우연한 일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 중학생 소녀가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었다는 것이 90년 이전에 일어났으면, 보도도 안 되고, 보도가 되어도 사람들이 반응을 안 보였을 거에요. 그런데 이문제가 2000년에 들어와서는 그런 우발적인 사고라고 통할 수 있는 문제가 더 이상은 아닌 것이죠. 요즘에는 조그만 문제만 생겨도 다 민족문제에요. 미국도 알았어요. 그래서 미국 공무원이 이야기 해요. ‘미국이 싫으면 주둔하지 않겠다.’

민족문제가 모든 것을 뒤엎는 시대가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요. 이 시대는 굉장히 위험한 시대에요. 1905년에서 1910년에서 보여주었듯이 민족이 강조될수록 국가 형성이 약해지는 경향을 언제나 보였어요. 이것은 유럽도 일본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민족을 강조하는 나라일수록 붕괴하는 나라에요. 즉, 정의를 외치는 사회가 정의가 없는 사회죠. 전두환 정권 시대가 정의사회구현 아니었어요? 정의가 없었으니까요. 무엇인가 형이상학적인 이념을 만들고 이데올로기로 이것을 구현하고자 하는 사회는 그것이 결핍된 거에요. 민족을 외치는 나라에서는 이제 민족이 없다면 국가가 지탱될 수 없다는 것이죠. 국가가 붕괴하고 있다는 거에요. 사설이나 칼럼에서 ‘이대로 국가 되는가’, ‘국가가 이래도 되는 것인가’라고 계속 이야기 하죠. 그러면 언제나 반론에서 ‘이렇게 보여도 우리 국가 튼튼하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문제 많다. 국가 장래가 어둡다’고 하죠. 이것이 하나의 증거에요. 민족이 강조되는 사회는 매우 불안정한 사회고 국가가 붕괴되는 사회에요. 우리사회는 그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보고 있고, 고구려사가 별 문제가 아닌데, 이런 것이 신문을 뒤덮고 언론을 뒤덮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현상이에요. 실제로 중국사람은 고구려 문제에 대해서 문제로 인식하고 있지 않아요. 왜냐하면 중국은 굉장히 넓은 나라잖아요. 중국에서는 고구려사는 역사를 왜곡하겠다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중국이 개발을 할 곳이 동북지역밖에 안 남아 있죠. 그리고 동북지역을 개발하지 않으면 빈부격차가 너무 커지니까 동북지역을 개발을 하겠다는 프로젝트에요. 그런데 부차적으로 역사도 다듬는 거죠. 지방사니까. 별문제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민족에 기대지 않고서는 다른 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거에요. 우리 사회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이데올로기나 구호는 민족이에요. 그 이상은 없을 거에요. 우리 사회에서 정의, 도덕 어느 것을 가지고 묶을 수 있겠어요. 남북한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도 민족 외에는 없죠.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주의해야 하는 것은 남한이 말하는 민족하고, 북한이 말하는 민족이 전혀 다른 개념이라는 거에요. 북한에서 ‘민족이 하나가 되자’라고 하는데, 우리 식으로 생각해요. 우리 식의 민족은 사실 아무 내용이 없는 거에요.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민족이 무엇을 뜻하는지요. 두 집단이 있는데, 같은 집단이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하죠? 첫번째로 우리가 내세우는 것은 혈연이에요. 우리는 한 핏줄이다. 그런데 한 핏줄이면 민족이 되는가.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핏줄이라는 것이 순수한 혈통이 없죠. 예를 들어 우리가 몽골의 지배를 약 130년 동안 받았는데, 이 동안 몽골이 우리나라를 완전히 지배했었잖아요. 우리의 피는 순수한 것인가? 아니죠. 어떤 의미에서 핏줄을 우리의 정체성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까, 단순히 핏줄이 같다고 같은 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간단하지 않아요.

그 다음은 언어거든요. 말이 통한다고 같은 민족인가. 과연 그런가. 말이 다르면 다른 민족이 되는가. 우리의 한민족 리포터들을 보면 같은 핏줄이래요. 그런데 핏줄도 의심스럽죠. 거기 현지인이랑 결혼했잖아요. 반쪽만 되면 되나. 미셸 위는 한국인인가 아닌가. 미셸 위는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죠. 한국계 미국인이죠. 그런데 한민족인가요? 그거 간단치 않아요. 미셸 위가 한국말을 전혀 못할 경우, 잘 할 경우 다 다르죠. 더 중요한 것은 미셸 위가 자신을 한민족으로 여기느냐 아니냐가 문제죠. 이것은 매우 주관적인 거거든요. 간단한 문제가 아닌데 ‘우리는 한핏줄이다’라고 교과서에 나오고 끝이에요. 

북한은 이것을 정교하게 다듬었어요. 북한은 민족개념이 5차례 변경이 있었어요. 처음에 북한의 민족개념은 ‘정치와 경제 사회 공동체’라는 개념으로 나왔어요. 그런데 북한이 나중에 이것을 포기해요. 이런 공동체로 따지면 남한의 사람은 민족이 아니기 때문에, 공산주의 체제를 공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북한이 이것을 다 빼고 ‘혈연과 언어를 가지고 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해요. 북한이 우리쪽으로 많이 맞추었어요. 90년 이후에 협력해야 하니까. 우리가 남북한의 문제나 우리 사회 내부를 결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이데올로기가 민족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이 되는 것이죠. 저는 이런 민족개념이 강조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결과는 매우 우려한다는 것이죠. 좋지 않은 상황이다.

지금의 민족을 운운하는 국가는 굉장히 적어요. 그 적은 국가들은 문제가 있고 못 사는 국가들이에요. 예를 들어 쿠르드족 같은 경우 민족개념이잖아요. 자치를 하겠다는 것이 다 민족 자치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못 살거나 열악한 조건에 있는 사람이에요. 잘 살거나 강대한 나라들은 민족개념을 더 이상 쓰지 않거든요. 서구나 일본에서의 민족개념은 19세기에 이용가치가 끝났어요. 더 이상 쓰지 않죠. 여러분이 만나는 외국 사람들은 민족개념이 없어요.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개념이 두 가지죠. 개인과 국가. 국가는 시민권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필요하고, 개인이 있죠. 중간에 민족개념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개인이라는 개념이 약하고 민족개념이 강하죠. 민족 다음에 개인, 그 다음에 국가죠. 이런 것의 열망이 어느 쪽으로 표출이 되었냐면 월드컵때 나타난 거죠. 우리가 이탈리아 이기면 이탈리아보다 선진국 되는 거에요? 아니거든요. 축구에서 이기는 것이 그렇게 기뻐요. 그러면 태국 사람들은 다 자살했거든요. 그거 그리 기쁜 일이 아니거든요. 축구는 즐기는 것이죠.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고, 잘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더 열심히 즐겨야 될 것은 국민의 프로 축구죠. 4년에 한번 즐기지 말고 일상에서 즐기는 것이 참다운 거죠.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에 신경을 안 쓰고 국가 대항전에만 신경을 써요. 국가 대항전이 민족간의 대결이라고 생각해요. 요즘의 스포츠란을 보면 한일전, 청소년 축구만 보아도 ‘ 질 수 없다. 그라운드에서 쓰러지련다.’ 맨날 나오죠. 일본은 그냥 축구를 하는데, 우리는 민족을 건다. 목숨을 건다. 이것은 이미 패배자거든요. 요즘에 스케이트를 봐도, ‘안톤 오노가 미국인이다. 반칙해서 금메달 놓쳤다.’ 지금까지고 물고 늘어지고 있죠. ‘안현수가 안톤 오노 이겼다. 드디어 복수했다.’ 크게 나요. 왜냐면 지금은 민족 개념이 먹히고 그러면 신문이 팔린다는 것이죠. 그런데 어제는 안현수가 안톤 오노에게 졌어요. 이것은 내일 신문에 ‘안현수 아깝게 은’이라고 조그맣게 날 거에요. 왜냐면 신문기사들이 편집할 때 교묘하게 민족감정을 부추긴다니까요.

우리가 월드컵 4강에 올랐지만 한국을 모르는 일본인이 60%가 넘어요. 그런데 이것은 미국 사람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맨날 국위를 선양한다, 세계에 알려진다, 올림픽도 누가 그렇게 열심히 봐요? 올림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은 육상이죠. 올림픽에서 태권도 하는지 안 하는지 누가 알아요? 그런데 육상은 다 보죠. 100m에서 우승하면 국위 선양될 수 있겠지만, 중남미의 조그만 선수가 우승했다. 기억하세요? 제가 보기에는 태릉선수촌을 운영하는 것 자체는 잘못 된 것이라고 봐요.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의 밑바닥에 민족이 깔려 있고 민족을 드높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죠.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가 드높일 수가 없어요. 우리가 지향하고자 하는 근대민족국가, 국가도 이루어졌고, 근대도 이루어졌고, 민족이라는 것은 이미 용도가 폐기된 것이거든요. 옛 사람의 그림자를 붙잡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것을 오래 붙잡고 있으면 부작용이 심하고, 나중엔 치명상을 입을 수 있어요. 근데 그 독소가 우리에게 퍼지고 있고, 언론들이 앞다투어 부추기고 있죠. 그리고 여러분도 이런 것에 쾌감을 느끼잖아요.

고구려 하면 드넓은 벌판이 생각이 나고, 시원하고, 그런데 고구려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수상한 것이 많아요. 족벌 따져보면 고구려가 우리의 역사가 될 것 같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있기 전에 조선이 있고, 그 전엔 고려가 있고, 고려 전엔 신라가 있었죠. 그런데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것 아니에요. 그러면 신라가 우리의 할아버지가 되겠죠? 그러면 고구려와 백제는 옆집 아저씨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가 아버지 놔두고 옆집 아저씨 좋아한다는 거 아니에요? 이거 불륜이고, 좀 이상하죠. 그리고 고구려를 멸망시켰을 때, 당과 연합하여 멸망시켜서 아무리 적게 잡아도 당이 50%의 지분이 있잖아요. 당나라도 연합군이니까 50%의 지분이 있을 텐데, 우리는 그 지분을 부인하고 있는 거죠. 오로지 고구려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다라고 하죠.

이것에 대해 반성해보자, 사실 이러한 반성은 북한에서는 했어요. 북한에서는 최초의 통일 왕조를 고려라고 봐요. 굉장히 위험하면서도 음모가 숨어 있는 건데요. 북한이 고려를 최초의 통일 왕조로 보기 때문에, 북한이 내거는 연방제 이름이 고려연방제에요. 절대로 조선연방제 쓰지 않아요. 언제나 고려를 사용하고, 고려가 최초의 연방제였기 때문에, 남북한이 통일한다면 고려라는 이름을 쓴다는 거에요. 고려가 영어로 표기하면 ‘C’가 되고, 북한에서 Korea를 Corea로 고치자고 제안을 한 것이죠. 우리나라의 민족주의에 불타는 사람이 여기에 동조를 하죠. 그런데 아니에요.

1905년에 한국에서 나온 여러 서적을 봐요. 다 K로 되어 있고, 10년 이후에 고친 것이 아닌데도 계속 주장해요. 북한이 노리는 것은 만약에 고구려가 민족의 정통성에 기여가 된다면 고구려를 이어받은 북한이 민족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것이죠. 고조선이 있었고, 고구려가 있었고, 이것을 이어받은 것이 고려고, 이것을 북한이 이어받았다는 것이죠. 정통성 문제에서 북한이 앞선다는 것이죠.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통일문제에서는 물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념의 문제라는 것이죠. 베트남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물질적으로 지원한다고 이기지 않는다는 것이고, 중국 통일에서도 있었죠. 이념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북한의 정통성을 암암리에 인정하게 되어요. 그러면 남한은 어떻게 되는가, 정통 세력이 아니고, 정통 세력을 방해하는 세력이 처단되요.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이 친일파 청산으로 드러나요. 북한에서는 이미 했다는 것이고, 남한은 안 했다는 것이죠. 너희는 정통성이 부족하다. 그러면 남한은 수세에 몰리죠. 이런 수세를 뚫기 위한 것이 민족에 있고, 그러면 민족의 근원은 어디에 있냐, 고조선에 있다. 그러면 고조선은 고구려로.. 또 이렇게 되는 거에요.

제가 보기에 이것은 단순한 역사문제가 아니에요. 북한이 왜 단군릉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고 단장했겠어요. 국가가 빈약해지기 때문에 이념적으로 강화시키는 것이고, 우리도 끼워 넣으려는 것이죠. 우리가 이념적으로 동조를 계속 한다면 북한이 쳐 놓은 그물에 걸리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는 지금도 상당히 걸려 있는 거예요. 언론에서 공개적으로 고구려사가 우리 역사인지 의심스럽다고 하면 매국노라고 하죠. 그런데 역사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토론을 해야 해요.

여러분들도 이런 문제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해 보셨을 것이라고 봐요. 고구려 문제, 독도 문제, 독도에 대한 서류를 보면 한국의 땅이라고 주장할 증거도 충분히 있지만, 일본의 땅이라고 주장할 근거도 충분히 있죠. 서로 얘기 안 하는 것이죠. 얘기하면 영토분쟁이 나잖아요. 일본은 지금 러시아, 중국과 영토 분쟁을 겪고 있죠. 그런데 한국까지 영토분쟁을 겪고 싶지 않아요. 일본이 보기에 한국은 일본급이 아니에요. 러시아, 중국은 일본과 급이 같고 한국은 급이 낮기 때문에 대응하면 부끄러워요.

북핵 회담도 처음에는 삼자회담하잖아요. 급이 다르죠. 남한에서 하도 뭐라고 하니까, 너희도 들어와라, 하지만 밖에 있어라 하고 육자회담이 된 거잖아요. 북한이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이잖아요. 일본도 재미있어요. 북핵 회담 나가서 회의록 보면 일본의 주장은 항상 ‘납치된 일본인 돌려 달라’, 그래서 북한이 화냈잖아요. 맨날 와서 이상한 이야기 한다. 일본을 빼라고 했더니 일본은 우리도 돈 낸다, 우리가 왜 빠지냐고 하죠. 그리고 나와서는 ‘납치된 일본인 돌려 달라’고 하죠. 이런 이야기 왜 하겠어요. 일본으로 봐서는 북핵문제는 꽃놀이 패에요. 둘 중에 하나죠. 북핵이 인정되면 일본에게 좋은 일이에요. 일본이 핵무장 할 수 있어요. 북한에 핵이 없다. 그럼, 일본에게 좋은 일이죠. 안전하니까. 그러니 끼어들 필요가 없고 국익만 챙기면 되요. 북한하고 경제 거래도 없잖아요. 그러나 따질 것은 ‘왜 우리 일본인 납치해 갔냐, 맨날 명단 내 놓으라’고 하죠. 북한은 짜증내죠. 북핵문제 이야기 하는데, 맨날 명단 이야기 하죠. 남한은 할 말이 없죠. 왜냐면, 미국이 알아서 하니까. 당사자는 북한과 미국과 중국이죠.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민족감정은 소용이 없다는 것이죠. 이것은 국가 문제라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는, 근대 민족국가 성립에서 국가 문제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요. 근대화는 우리가 이루어 낸 것이고, 민족이라는 개념은 모호한 개념이고 용도 폐기된 개념인데, 계속 붙잡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의 미래를 봐서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적응이 되세요? 특이한 체질이시네요. 민족주의에 대해서 10분 정도 더 이야기를 드리고 질의 응답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지금 어떤 분위기이냐고 하면 민족주의는 신성불가침의 가치에요. 민족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요. 저는 신성불가침의 가치가 존재하는 사회는 반드시 망한다고 믿어요. 이상의 ‘날개’라는 소설을 아시죠? 그런데 이상의 날개는 1926년에 발표되었는데, 그 소설은 표절이에요. 몇 년전 문예춘추에 소설이 발표되었는데, 똑같아요. 그것은 완벽한 표절이거든요. 언론은 이상의 ‘날개’가 표절이었다는 것을 쓰지 않아요. 한용운, 김소월을 꼭 쓰고 ‘민족을 지키다 숨진 문인들’이라고 해서 특집 나와요. 3.1절 얼마 안 남았잖아요. 최근에 이상의 날개가 표절이다라는 것을 학자가 발표했어요. 그런데 학계에서 주목하지 않아요. 왜냐면 그것은 민족이라는 신성불가침에 도전하는 것이거든요.

세 번째 단계에서 일제시대에 속했던 모든 사람은 친일파와 민족주의자로 구분되죠. 저는 친일파가 이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일본과 친하다는 것이 왜 죄가 되요? 그것은 말이 이상한 것 같아요. 그것보다는 일제시대에 친체제겠죠. 체제에 옹호했던 사람, 체제에 반대했던 사람. 저는 양쪽 다 우리 민족의 발전에 공헌한 사람이라고 봐요. 친일을 했던 사람도 우리 사회에 일정부분 기여한 바가 있어요.

기술을 배웠고, 자본을 축적했고, 인재를 길러낸 것이죠. 예를 들어, 고려대도 대표적인 친일파인데, 문닫아야 한다는 이런 소리를 안 합니까? 김성수도 친일파였죠. 그렇다면 친일파가 세운 고려대도 문닫아야 하는 거죠. 친일파를 처단해야 하면, 고려대의 문을 닫아야 하는 것이죠. 고려대는 어떤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민족고대’ 라고 하면서, 그러면서 매번 조선일보를 친일 했다고 욕하죠. 연세대도 친일을 했고, 이화여대의 김활란도 유명한 친일파였죠. 그렇게 보면, 빨리 스스로 문을 닫아야 하는 것이죠. 문 닫지도 않을 거면서 매일 친일했다고 들춰내죠. 그런 문제는 논리가 맞지 않는다고 봐요.

국회가 더 웃기죠. 친일파를 청산하자고 해요. 50년이 넘었는데, 모금도 하잖아요. 몇 억씩, 이것은 매우 위험한 징조에요. 아주 좋지 않아요. 실제로 누가 우리 민족을 위해 공헌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친일파가 다른 사람들을 많이 구해 냈을 수도 있는 거에요. 빈둥거리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사람은 친일파가 아니니까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민족주의자가 되는 거에요. 그리고 저같은 사람은 김구 같은 사람을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해요. 그가 한 일이 없잖아요. 한 일이 뭐가 있어요? 상하이에 모여서 도시락 폭탄 만든 일밖에 없잖아요. 임시정부가 그 당시에 수십 개가 있었죠. 김구만이 정통의 임시정부라는 근거를 대기 어려워요. 그리고, 김구가 민족을 위해 한 것이 독립운동이었다면, 팔레스타인들이 하는 것도 테러가 아니라 독립운동인 거죠. 멀쩡히 살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와서 땅을 뺏었잖아요? 그렇죠? UN결의라면서 다 몰아낸 것이죠. 그렇다면, 거기 살던 사람들이 UN결의니까 하면서 다른 곳으로 가서 살겠어요? 우리 땅을 찾자고 할 것 아니에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잖아요. 김구가 그런 것이죠. 우리는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라고 부르죠. 우리는 우리의 처지를 모르고 이중잣대를 가지고 보는 거에요. 아랍인들은 테러리스트이고, 우리는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그래서 이러한 것을 이야기하면, 이상한 사람이고 민족반역자인 것이죠. 왜 그런 것을 연구하냐고 욕을 먹게 되죠. 학계에서도 싫어하죠. 그래서 저 같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어요? 김구가 테러리스트라고 본다고 하면, 저를 죽일 듯이 보죠. 아무리 백수라도 저렇게 나가도 되는 것인가 하죠.

제가 생각하기에 민족이라는 신성불가침의 가치에 도전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금기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위험한 것이라는 거죠. 안중근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는데, 거시적 관점에서 보자면, 안중근은 판단착오를 일으킨 사람이죠. 그 당시 일본의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었는데, 강경파는 일본이 한국을 합병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고, 온건파는 합병할 필요 없이 자치를 유지시키자고 보는 입장이었죠. 그런데 정세상으로 온건파가 우세했었죠. 합병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국제적인 비난도 받으며, 한국에 그만한 가치를 얻을 것이 없다고 지금으로도 충분하다고 보았죠. 그게 대세로 이토 히로부미는 정계에서 노쇠한 사람이었는데 안중근이 착각을 해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이죠. 그러자 일본에서 강경파가 득세하게 되면서 ‘봐라, 가만두면 저런 꼴이 난다’ 하게 된 거죠. 일본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어요. 죽어도 아무 상관없는데, 이것을 빌미로 강경파들이 득세하게 되면서 합병이 된 것이에요. 안중근은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이토를 죽였다고 하겠지만, 판단착오 였던 거죠.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는 이토가 아니라 강경파를 죽였어야 하는 것이죠. 잘못 죽였어요.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안중근은 끝까지 굳세었다고 하잖아요. 일본에서도 물론 굳세었던 것은 인정해요. 그러나 안중근이 한 행위가 국제정세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는 다른 문제이죠. 그런데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민족반역이죠. 왜 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입니까? 안중근이 가진 정보는 한정되어 있었고, 판단이 미숙했던 것이죠. 일본의 정세를 모르고 일본에 안중근이 좋은 빌미를 주게 된 것이죠.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을 때,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 많이 슬퍼했죠. 특히 고종이 많이 슬퍼한 것이 기록에 나오죠. 왜냐하면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을 지켜준 입장이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것을 공개하고 토론하는 것을 금기시하죠.

자료에 있지만, 외면하죠. 지금의 검찰과 같죠. 기업에 오지만 한쪽만 복사해 가는 것과 같죠. 있어도 보지 않죠. 우리나라의 사학자들도 사료에 있지만, 비판적으로 해석하지 않죠. 이상이 표절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구를 대조해 보지 않는 것이죠. 이 시기의 문학은 모두 민족문학으로 보고 한용운의 ‘님은 갔습니다’ 에서 ‘님’은 민족을 의미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님’이 무엇인가는 독자의 마음인데, 그것을 왜 조국의 독립이라고 강요합니까? 저는 이런 부분을 헌법소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 비판을 못 하죠. 왜냐하면, 민족은 지고의 가치이니까요. 여러분도 그렇게 배웠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 하시잖아요. 이러한 사회는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에요.

이 말씀을 왜 드리는가 하면, 요즈음 창의성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선진국에 못 가는 이유는 창의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잖아요. 따라서 창의성을 키우고 영재교육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방안은 많잖아요. 그러려면, 억압을 풀어야 합니다. 영화검열을 없애는 것은 사소한 것이에요. 민족이라는 신성불가침의 이데올로기를 제거해야 해요. 그러면 창의성은 살아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괜히 죽인 거에요. 위의 이야기는 영화나 코미디로도 만들 수 있어야 해요. 이토 히로부미는 지극히 웃기는 사람으로 나오고, 안중근은 더 웃기는 사람으로 나오고요. 우연에 의해 사살하게 되는 이런 것을 보고 사람들이 보고 즐기면서 진지한 역사의식을 가져야 창의성이 생기지, 도전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하면 창의성은 생기지 않아요. 그것이 서양에서의 중세이죠. 신의 영역에 도전할 수 없다면 이렇게 되는 것이죠. ‘신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God)’ 를 붙이면 다 되는 것이죠. 지금 우리나라는 ‘민족의 이름으로’ 에요. 민족의 이름에 도전하면 용납이 안 되죠. 그런 사회는 창의성이 없죠. 민족을 갖고 재미있게 놀아야 합니다. 신도 가지고 놀아야 해요. 신이 놀이의 대상이 되었을 때 ‘르네상스’가 생겼고, 창의성이 된 거죠.

그러나 우리나라 기업은 창의성에 특별한 묘책이 있다, 아침형 인간이 되고 책을 많이 읽으며, 바보들처럼 이런 모임을 만든 거에요. 무엇을 모여서 이야기를 듣습니까? 여기에 모인 강사명단을 보니 다 뻔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에요. 왜 밤에 돈 내고 밤에 모여요? 노시지… 저는 이런 사회는 발전이 없다고 봐요. 이런 사회는 전형적인 현지고용인의 사회에요. 전적으로 창의성이 억압되어 있어요.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이 안중근의 실책이 아니었을까?’ 라는 것에서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고, 그 근거를 즐겁게 이야기하며, ‘이토 히로부미는 나쁜 사람은 결국 아니구나. 그렇다면 죽이는 것이 능사인가?’ 를 즐겁게 토론하며 머리가 열리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 사회는 용납이 되지 않죠. 이런 모임도 여러분이 지도층에 속하셔서 오셨어도, 여기의 강연이 TV와 같지 않습니까? 긍정적으로 사고하라, 그러면 창의성이 증진된다는 것이죠. 문제는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긍정적으로 사고합니까? 사기꾼이 먹고 살기 좋은 사회가 요즘이죠. 왜냐하면 맞춤을 해 주면 되니까요. 저도 가끔 방송국에서 특강 같은 것이 들어오죠. 내용은 현재 계층간의 갈등이 심하니까, 화합을 도모하는 강연이 의뢰가 옵니다. 그러면 저는 못한다고 합니다. 저는 화합을 도모할 마음이 없으며, 화합되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고 하죠. 어떻게 모두가 하나가 되는 사회가 있을 수 있냐고 했어요. 배워야 되는 것은 쪼개져서 투표한 후 깨끗하게 승복하는 것이죠.

우리나라의 창의성이 생기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강의가 리더십(Leadership) 위주로 가기 때문이죠. 그러나 실제 필요한 것은 Followership이에요. 리더는 Follower가 해 주어야 가능한 것이죠. 그러나 매일 CEO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리더가 될 수 있는가만 가르치죠. 솔선수범하고, 거대한 목표를 잡되 꼼꼼하게, 군대와 같죠. ‘대강, 철저히’이죠. 리더가 되는 방법이 목표는 크게 잡되, 업무는 미세하기 하는 것이라고 하죠. 이보다는 패배했을 때 어떻게 따라갈 수 있는가를 배워야 하죠. 선거에서 졌더라도, 탈당하지 않고 져도 끝까지 간다는 것이죠. 뽑힌 대통령이 잘못해도 Follower들이 잘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것이 억압들인데, 가장 큰 억압이 우리나라에서는 민족이라는 거죠. 우리나라에서도 위험한 것이 보이는데, 영화 ‘실미도’ 가 1,000만 명에 육박했잖아요. 이 영화의 내용이 무엇이죠? 힘들게 훈련 받았으나, 국가가 나를 배반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나는 이대로 죽을 수 없어 숨겨진 진실을 폭로하는 거죠. 이것이 얼마나 웃기는 것인가 하면, 국가가 그 정도의 기밀작전을 수행했다면, 지금까지 아무도 몰라야 하는 것이죠.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모두가 알고 있다는 것이 어떻게 기밀인가? 저는 국가기밀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왜 이 영화를 열심히 보냐면, 우리사회가 그만큼 허하다는 것이죠. 중심이 없고, 남북한의 문제가 아니라면, 이만큼 볼 리가 없죠. 이라크 가는 사람들이 그만큼 훈련을 받다가 뛰쳐 나가서 난동을 부린다면, 사람들이 볼 리가 없죠. 게다가 요즈음은 한 발 더 나아가 ‘태극기 휘날리며’는 정말 민족문제이죠. 6.25 전쟁에서 형과 동생이 남북으로 갈리면서 형제애가 등장하죠. ‘남북-민족-형제애’까지 되는 것이죠. 쉬리나 JSA도 민족문제 였죠. 우리나라에서 코미디는 잘 안 되요. 사람들은 왜 저런 것을 볼까 싶지만, 실제로는 봅니다. 왜냐면, 신성불가침의 가치라서 자기가 이를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 안도감을 주는 것이죠. 내가 사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거죠. 왜 저런 민족지상주의 영화가 웃긴다고 하면 사회에서 소외되죠. 사람들이 상대하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실미도’ 같은 영화를 보고 눈물이 나더라고 하면 안심이 되죠. 난 여전히 사회에 속해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 사회는 억압된 사회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기업에서 창의성도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국사’ 라는 과목이 있죠. 역사가 있는데, ‘국사’ 라는 것은 단 한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는 거죠. 다른 해석은 틀린 것으로, 이런 나라가 세계에서 우리나라 뿐일 것이에요. 일본이나, 미국도 국사 교과서가 여러 가지 중에서 고를 수가 있는데, 우리는 고를 수가 없죠. 이게 정답인 거죠. 그런데, 어떻게 역사해석에서 정답이 있을 수 있습니까? 창의성을 억압하는 거죠. 
근대민족국가에서는 공유된 역사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똑 같은 역사지식이 있죠. 몇 십년간 같은 책으로 배우기 때문이죠.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침입했는데, 그 때 웃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못하죠. ‘일본이 쳐들어 왔을 때 사람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여기서 구름처럼 몰려오는데 끝까지 싸웠을까? 얼른 성문을 열어주고 항복했겠지’ 라는 생각을 못하죠. 그러나 이런 생각을 못하죠. 책에는 끝까지 싸웠다고 나오니까요. 실제로 그러했는가 하면, 아니죠. 임진왜란 때 얼마나 빨리 진격했냐 하면, 부산에 도착해서 한양까지 15일이 걸렸어요. 지금 우리가 걸어도 15일이 걸린다는데, 너무 빨리 도착해서 일본이 굉장한 차질이 생겼다는 거 아닙니까. 군수물자가 안 왔다고 해요. 싸울 병력이 없는 거죠. 정면으로 도전하려 하면 상대를 안 했다고 해요. 임진왜란을 그린 소설이나 역사서를 보면 모두 장엄하죠. 민족의 커다란 재난을 맞이하여, 모두가 떨쳐 일어났다는 거죠. 그러나 이는 거짓말이죠. 왜냐하면 당시의 조선인구는 기껏해야 200만 명으로, 시골에 많이 살았는데, 산골 사람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났는지조차 몰랐다는 거에요. 실제로 6.25때 산골에 살던 사람들은 전쟁이 있었는지 몰랐다고 해요. 그러니까 싸운 사람들은 별로 없고, 길가에 있던 사람들만 싸운 거죠. 그 사람들조차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도망갔죠. 우리나라는 칼이 없어서 병기가 화살이나 창이었어요. 화살도 양궁이 아니라 국궁으로, 허리에서 한참 걸리는 화살이죠. 일본은 조총인데, 전쟁이 되겠어요? 빨리 도망가야지요. 남한산성, 북한산성도 보면, 이게 성입니까? 전투하기 위한 성은 아니죠. 마음의 안심이 되는 ‘성’ 이죠. 이런 문제에 대해서 임진왜란의 실상을 밝혀보자고 하면, 민족반역자이죠. 이순신이 장엄하게 싸웠다고 해야지, 그 때 우리나라에 군대가 없어서 ‘이이’ 가 ‘십만 양성’을 주장한 것이죠. 군대가 없어서, 십만을 양성하자고 한 거죠. 일본군은 내전을 통해서 다진 정예된 군대였죠. 당해낼 재간이 없는 거죠. 이런 것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해 보자고 하면, 민족이란 이름으로 억압하죠. 그래서 임진왜란에 대한 코미디가 나오지 못하죠. 코미디는 비극을 희극으로 전환시키는 것인데, 아픔이지만 웃음을 찾아내는 것이죠. 그러나 민족의 이름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죠. 상상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력의 빈곤이 당연한 것이죠. 제가 보기에는 이것부터 뜯어 고쳐야 상상력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러한 것들이 제거되어야 창의력도 생기고, 바탕이 되어야 현지고용인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이에요. 현지고용인의 특성은 관리자로, 시키는 것을 할 뿐이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없죠. 따라서 이공계는 당연히 인기가 없어요. 현지고용인에게 기술은 필요 없고, 관리만 필요한 것이죠. 근데, 관리자는 문과가 하는 것이죠. 사람들은 동물적 후각으로 이를 알죠. 지사장을 하면 되는 것이죠. 지사장이 공장을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죠. 요즈음은 매뉴얼이 발달되어 있어서 전자동, 관리가 가능하죠. 지배하는 나라들은 창의력이 필요하죠. 그런 면에서는 민족이라는 이름이 더 이상 흥행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예정 연구원 yjlee@ip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