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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영자독서모임으로의 초대29: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
발간일 첨부파일 10P_TABLE.doc

저자:황병기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나는 지금 음악을 하고 있고 대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술을 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나는 술을 거의 못한다. 다른 이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나는 인생을 취해서 살고 있는데 술을 마시면 그 취함이 깬다. 젊은 시절 미래에 대한 야망이나 목표라는 것은 나에게 없었다. 그저 소원이 있다면 그저 평범한 사람이 되어서 이름없는 시민으로 사는 것이 전부였다. 지금 지나고 보면 유명해진 나를 발견하고 느낀 것은, 평범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미래에 대해 큰 목표를 정한 대개의 사람들 보다 오히려 더 평범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것일까.

 

백남준 선생


1968년 뉴욕에 가서 백남준 선생과 친분을 가질 기회가 있었다. 당시 한국에는 그의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20세기 전세계 최고의 괴짜이다. 좋은 뜻, 나쁜 뜻이 모두 있겠지만, 좋은 뜻으로만 보자면 그는 정말 기발한 사람이다. 그의 기발함은 유복했던 집안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어린 시절, 바지를 새로 사주면 무릎을 싹둑 자르곤 했는데 웬만큼 넉넉한 집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음이 당연하다. 게다가 당시의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우리의 젊은이들은 그런 바지를 입고 다닌다. 바로 시대를 앞서가는 인물인 것이다. 텔레비전이 공급되면서 비디오아트를 생각해낸 백남준 선생의 행동이나 작품에 일반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몇 년 후에는 우리 생활 속에서 그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작곡을 전공했던 그가 독일 프라이브루크 음악대학에 사사하고픈 교수를 찾아갔던 일화는 유명하다. 교수가 그에게 작품을 보여달라고 하자 그는 가방에서 도끼를 꺼내어 교수의 그랜드피아노를 찍으려고 했다. 바로 그 때, 그 교수가 백남준 선생의 손을 잡고 했던 말이 바로 “자네의 작품 경향은 내 경향과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내가 지도할 수 없을 것 같네”이다. 이후 백남준 선생은 존 케이지를 만나 뉴욕에 가게 되었다. 당시 전세계 예술의 중심인 뉴욕에는 내로라하는 전위예술인들이 넘쳐났다. 그래서 그는 음악으로 섹스를 표현한 첼리스트 샬롯 무어맨과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Opera Sextronique)'라는 작품을 공연했다. 그러나 공연도중 뉴욕경찰에게 경범죄로 체포되어 며칠 동안 감금되었었고, 풀려나자 자신의 예술활동을 제약한 뉴욕경찰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집안이 기울어져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소송비용이 없자, 맨하탄에서 음악사상 처음으로 “재판기금모집연주회”를 열었다. 이미 충격적인 공연과 공연 중 체포 사건으로 세상이 그를 인식하고 있던 차라, 그의 연주회는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당시 나도 그의 공연요청을 받고 출연하였는데 샬롯 무어맨이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나와 지퍼가 달린 자루에 들어가 나의 가야금 가락에 맞추어 공연장을 구르다가 가끔씩 얼굴을 내밀고 관중을 쳐다보기도 하는 등 특별한 공연을 하게 되었다.

 

가야금 인생의 시작


6∙25 피난 시절인 1951년부터 오늘까지도 한번도 가야금을 뜯지 않은 적이 없다. 오늘날 사람들이 나에게 국악을 지키고 발전시킨다고 칭찬하지만, 그런 의도로 가야금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저 이유 없이 가야금이 좋아서 시작했고, 지금도 그 마음이 변치 않아 가야금을 계속할 뿐이다. 공자의 논어가 시작하는 ‘배우고 그 배운 바를 때때로 익히면, 이 아니 즐겁지 아니한가’ 라는 말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지금껏 살면서 가장 즐거운 일은 배우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공자는 열심히 하라고 강조한다던가, 배움의 즐거움만을 단정하고 있지 않기에 더욱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중고등학생시절 방과후에 국악원에서 매일 가야금을 연습했던 것은 공자의 말처럼 그저 가야금 소리가 좋고 그것을 연주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가야금을 즐겼던 것처럼 서울대 법대 4년 동안도 즐겁게 전공공부를 했다. 당시 음악대학 학장이었던 현제명 선생이 1959년에 처음 생길 한국 최초의 국악과 가야금 강사로 나를 초빙했다. 이미 고등학교 3학년, 대학교 3학년 때 전국 콩쿨에서 우승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나는 졸업하자마자 3월부터 음악대학 강사로 출강했다. 신입생이 졸업할 때까지 4년 동안은 학생들을 가리키기로 마음먹고 1963년까지 출강하면서 가리킨 학생 중 두 명이 지금 서울대 교수로 정년을 바라보고 있다니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서울대 출강을 그만두자 국악과 나의 인연은 오히려 더욱 깊어졌는데, 1964년 국립국악원의 최초 해외 연주에 독주자로 공연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20세기 음악예술제”에 동양 작곡가 대표로 초대되었기 때문이다.
1962년부터 시작한 작곡은 전통도 좋지만, 우리 시대의 음악도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그 때 나에게 자극을 준 것은 바로 시인 서정주의 ‘국화옆에서’라는 시였다. 바로 그 시를 우리의 선비들이 부르던 전통적인 가곡(歌曲) -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가곡은 일본의 명치유신 시절, 독일의 리히트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 우리 전통의 가곡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밝혀둔다. - 으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 가곡의 가사는 모두 시조였다. 대학시절 배운 전통가곡 스타일을 기초로 서정주 시인의 시어의 변화에 그대로 맞추어 가곡을 쓴 것이 바로 나의 가곡 처녀작이다.


사실 국악에서 작곡이란 불가능하다. 원래 국악에는 작곡이란 존재하지 않았기에 선생도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백남준 선생과 존 케이지 등을 만나 현대예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는 절대 서양음악 흉내를 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완전히 국악식으로 하지만 그 틀을 깨려고 마음 먹었다. 물론 국악만으로 새 곡을 만들되 그 틀을 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올리비에 메시앙의 “불가능성의 매력”이라는 말처럼 불가능한 일이기에 더욱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바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모여 결국 바위를 가르듯이, 작곡을 거듭하다 보니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의 음악 중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된다면 그 아름다움에는 반드시 법칙이 있을 것이기에 그 법칙을 찾아 새로운 음악에 적용할 수 있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국화옆에서”이다.

 

한국의 노래


한국사람들은 노래하기를 굉장히 좋아한다. 그 사실은 최소한 삼한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뭐든지 기록으로 남기기를 좋아하는 중국의 진수는 이미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노래를 좋아하는 한민족의 특징을 써 놓은바 있다. 그렇다면 그 노래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정의를 내리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저 말하는 것을 길게 빼서 하는 것을 노래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정의를 무식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데, 이 무식한 말을 유식하게 만드는 간단한 방법은 바로 한문으로 적는 것이다. 말을 길게 뺀다는 말을 한문으로 영언(永言)이라 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말은 청구영언(靑丘永言)으로써, 청구는 동방, 즉 우리 나라를 의미한다. “청구영언”이란 선비들의 노래를 모은 가사집으로 요즘으로 치면 대중가요모음집이 되겠다. 선비들의 노래의 가사인 시조(時調)의 의미는 영어의 poetry가 아니라 때 시(時), 즉 contemporary가 될 것이다. 그 시조들 중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조를 하나 예로 들어 보자.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어단성장(語短聲長)이라는 법칙 아래, 동창을 붙여서 3박, 이를 2박으로 뽑을 수 있겠다. 서양식 음계를 가지고 표현해 보면 4도가 떨어지게 된다. 이때 도에서 솔로 떨어지는 등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한국음악의 특색이라 할 수 없다. 한국음악의 특색이란 바로 음이 떨어질 때의 힘을 받아 툭 떨어지는 것이다. 물이 흐르다가 폭포로 떨어지면 물방울이 튀듯이 이러한 음의 변화는 바로 자연과의 조화인 것이다. 덧붙여 그 떨림이나 음의 변화에서 나아가 떨어지는 준비로써 음이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때의 떨림은 음의 높이뿐만 아니라 그 크기에도 잔잔한 변화가 있어 마치 붓글씨를 쓰는 듯 하다.

 

(표삽입) 평시조로 읽어낸 “동창이 밝았느냐

 

이렇듯 우리나라 음악은 느릴수록 스릴과 서스펜스가 있다. 아름다운 정원을 걸어서 감상하듯이 느리고 여유 있게 표현한다. 물론 위에 표현한 것은 평시조로 읽어낸 것으로 선비들의 가곡(歌曲)으로 읽어내면 더욱 느리고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요즘의 빠르고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는 소리를 예전에는 난세지음 또는 망국지음이라 한다. 요즘 그런 음악들이 유행하는 것은 세상이 난세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평화로워야만 올바른 음악이 나오는데 이것을 대악(大樂), 정악(正樂) 또는 아악(雅樂)이라 한다.

 

나의 음반들


62년부터 시작한 작곡활동을 통해 “국화옆에서”, “숲”이 작곡되었다. 이들은 “20세기 음악예술제”를 계기로 미국에서 첫 음반을 낼 수 있었다. 당시 하이파이브 레코드 리뷰라는 잡지에서 ‘하이스피드 시대 현대인의 정신적 해독제와 같다’는 극찬을 받았다. 당시 나의 작품들은 사람들을 흥분시키기 보다는 명상적이고 영혼을 씻어주는 것들이었다.
국내에서는 78년, 명창 김소희(金素姬) 선생을 통해 성음(成音)이라는 음반사를 통해 첫 음반이 나왔는데 그 반응은 놀라웠다. 1집인 “침향무(沈香舞)”의 “침향”은 바로 인도를 상징하는데, 나아가 불교를 의미한다. 우리 전통음악은 조선의 음악이다. 음악은 연주하는 그 순간 사라지는 특징으로 인해 신라나 고려시대 음악은 전혀 알 수 없다. 당시 나는 조선시대음악의 틀에서 벗어나려고 신라시대에서 작곡을 시작했다. 물론 음악은 남아있지 않지만, 불상이나 조각들은 많이 남았기에, 그들이 움직이는 모습, 즉 춤을 상상하게 되었고 그 춤에 어울리는 곡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곧 신라인들의 청을 받아 춤곡을 작곡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침향무”이다.


“침향무”의 여세를 몰아 “비단길”이라는 2집을 내게 되었는데, 당시 신라의 고분발굴 기록영화를 만드는데 있어 나에게 의뢰된 배경음악이 그 계기가 되었다. “침향무”를 중심으로 배경음악을 만들어 호평을 받은 후 고분의 유물을 보는 중에 페르시아의 유리그릇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페르시아와 신라를 연결하는 것이 바로 비단길이었다. 서양의 음색을 넣기 위해 음계도 국악의 5음계가 아닌 7음계를 사용하였다.


공간사의 “세계 현대음악제”에 작품을 의뢰 받아, 전위예술이 주제였던 음악제에 발맞추어 가야금을 사용하여 만든 새로운 음악이 바로 “미궁(迷宮)”이다. “미궁”은 가야금 본연의 소리를 벗어나 처음부터 끝까지 첼로 활, 거문고 술대, 장구채 등을 이용하였으며, 가야금 줄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몸통을 두드리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새로운 소리를 좇았으며, 여자의 목소리를 첨가하였다. 1975년 초연 시, 청중 한 명이 소리를 지르고 도망쳤으며 바로 공연금지를 당하였다.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검사하던 당시 “미궁”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당시 평론가들로부터는 극찬을 받았지만, 대중들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나 작년에 다시 “미궁”이 인터넷으로 전해지면서 중고등학생들이 음반과 죽음을 연관시켜 입에서 입으로 소문을 내는 등 이에 대한 수많은 논란이 일어나서 웹사이트를 중단시킬 정도였다.
4집은 “춘설(春雪)”이다. 자랑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껏 소개한 나의 음반들은 국악에서 최장의 스테디셀러이다. 처음 나온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그 판매량은 꾸준히 일정수준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준비 중인 5집에는 2001년 대장암 초기로 난생처음 입원과 수술을 경험했다. 수술 전후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을 겪으며 비참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조용한 밤, 병원 앞의 시계탑이 조명을 받은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특히 병원에 입원한 환자에게 있어 그것은 마치 별세계의 느낌을 주었다. 이상한 것은 비참한 지경에 이르니 굉장히 아름다운 곡을 쓰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그래서 “시계탑”이라는 곡은 소녀취향의 아름다운 분위기이다.

 

강의를 마치며


나는 집에서 문을 닫고 홀로 앉아 가야금을 연주하며 사색에 잠기는 것을 즐긴다. 강의 초반에 나는 인생을 취해서 산다고 했는데, 지금도 역시 죽을 때까지 특별한 목표는 없다. 사실 50년이 넘도록 가야금을 해왔지만, 누구에게 나의 음악을 선전해본 적은 없었던 것처럼 그저 죽을 때까지 가야금 소리를 조금이라도 다듬고 싶을 뿐이다.

 

* 이 원고는 지난 8월4일 제16기 경영자독서모임에서 진행되었던 황병기 교수의 강의를 바탕으로 IPS에서 재작성한 것입니다.



원희경 연구원 hkwon@ip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