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esting,
Pioneering and Satisfying

 뉴스레터

제목 경영자독서모임으로의 초대28:성공한 왕, 실패한 왕
발간일 첨부파일

저자: 신봉승 교수(추계예대 영상대학원)

정신적 근대화와 국가의 발전
오늘은 주제인 "성공한 왕, 실패한 왕"보다는 책의 내용, 또는 역사의 상황과 우리의 현실 인식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지난 달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수 차례 강연을 하면서 시작 전에 항상 던지는 질문은 "우리 살아 생전에 한국의 GNP 2만 달러를 넘을 수 있겠는가?" 라는 것이다. 심각한 이야기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의 대한민국이라면 GNP 2만 달러를 넘을 수 없다고 나는 확언한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한 국가가 형성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화(近代化)를 반드시 겪어야 한다. 우리는 5.16 이후 물질적 근대화는 어느 정도 접근한 것이 사실이고, 이 때문에 GNP 1만 달러를 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터키인 오스만투르크는 700년 동안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전세계를 완벽하게 지배했던 국가였음에도 지금 GNP는 3천 6백 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초등학생들이 백만원 단위의 지폐를 사용하여 물건을 구입해야 하는 터키에게 쿠데타를 일으켜서 화폐개혁을 하도록 건의하는 나에게 터키의 관리자는 놀라운 대답을 했다. 대답인즉 터키는 쿠데타가 한번 일어나면 3일에 한번씩 재발하게 될 불안한 정국이기 때문에 그 상태로 계속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엄청난 좌절이 아닐 수 없다. 터키가 성소피아 성당과 같은 엄청난 문화적 유산을 갖고도 낮은 수준의 GNP에서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진정한 의미의 정신적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근대화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정신적 근대화이다. 정신적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국가는 특정 수준 이상을 나아갈 수 없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바로 그렇다. 우리는 가까운 일본과 한국을 자주 비교하는데, 두 나라의 격차는 무려 130년이며, 이 격차의 근거는 바로 정신적 근대화이다. 일본이 정신적 근대화를 이룬 계기는 그 유명한 명치유신(明治維新)이다. 명치유신은 200건에 달했던 크고 작은 내란과 같은 혼란을 16년 만에 극복해내고, 이것이 오늘날의 일본을 만들어 냈다.

한국의 첫 정신적 근대화 기회 : 소현세자
우리 또한 정신적 근대화를 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 병자호란이 있었던 1636년 후금의 홍타이치 장군이 조선의 인조에게서 문서로써 항복을 받고, 인조의 25세 큰아들 소현(昭顯)세자를 인질로 데려갔다. 그는 지금의 심양에서 인질로 지내면서 9년 동안 조선을 대표하여 외교를 함을 물론, 조선보다 앞선 후금의 문화를 속속들이 알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후 후금의 세력은 더욱 강대해져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을 건국하기에 이른다. 소현세자는 청의 장군을 따라 북경에 이르러 새로운 책을 수없이 접하고 아담 샬이라는 독일인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화약과 대포를 만드는 과학자였던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통해 천주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많은 서양의 과학과 천주교에 대한 많은 책과 자료를 선사했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에게 “천주교는 조선 사람들에게 전해도 전혀 해가 없을 것이며, 과학 관련 책들을 조선의 과학자들에게 읽혀서 과학을 장려할 것이다.”라는 서신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현세자 조선으로 돌아오자 그를 청의 간첩이라는 등 많은 모함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인조조차 그를 오해하여 소현세자는 결국 조국으로 돌아온 지 수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역사에는 가정이 통하지 않지만, 만일 소현세자가 살아있었다면 우리는 정신적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가능성이 있었지만, 국운(國運)이 닿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야기를 잠깐 돌려 보면, 올해는 양의 해이다. 12간지(干支)에 등장하는 양은 뿔이 달린 산양으로 그 성격이 고집스럽고 고약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리고 양의 해 또한 그런 성격을 보이는데, 역사의 행간을 양의 해를 기준으로 하여 읽어보자. 1871년 신미(辛未)년에는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있었으며, 1883년 계미(癸未)년에는 민용일과 홍영식이 미국정권공사로 미국에 방문하여 엘리베이터를 보고 엄청난 문화충격을 겪은 바 있다. 1895년 을미(乙未)년에는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했다. 1907년에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했던 이준이 죽고, 고종황제가 강제로 폐위당하였다. 1919년에는 3•1운동이 일어났다. 다시 2003년 양의 해,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고, 북핵 문제 등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지나간 역사를 잘 살펴보면 거기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을 정확히 파악한다면 한국의 정신적 근대화를 이루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일본에게 비견할 수 있는 과학과 정신적 근대화가 필요하다. 구체적인 예로써, 세계은행은 2020년이면 중국의 경제가 미국을 추월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앞으로 17년 동안 중국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모른다. 중국은 내수만으로도 GNP 2만 달러를 넘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시점에서 한국과 같이 변방국가에 지나지 않았던 일본은 명치유신을 통해 정신적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내어 선진국 대열에 서게 되었다. 앞으로의 한국을 역사 속에서 풀어나가 보기 위해 명치유신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일본의 정신적 근대화의 완성 : 명치유신
1853년 7월 미국 군함 5척이 일본 해안에 정박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당시 까지 나무로 만들어 노를 젓던 배만 보았던 일본인들에게 증기를 동력으로 가는 철로 만든 배는 굉장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때까지 한국은 임진왜란 이후 250 여 년간 일본에 통신사를 수백 명씩 파견하였던 것처럼 일본보다 훨씬 앞선 상황이었지만, 1853년을 기점으로 그 판도는 달라진다. 다섯 척의 미국 배를 보고 끝까지 돌아가지 않고 26살의 사무라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자신이 그 배에 타야만 일본도 같은 배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 것이 바로 비전, 꿈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가네꼬 스게노스께라는 하인과 나무 조각배를 타고 노를 저어 태풍을 뚫고 페리 제독이 타고 있는 미국 군함에 닿았다. 수교를 맺지 않은 상황에서 페리 제독은 그들을 받아 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요시다 쇼인과 그의 하인은 다시 일본의 해변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 길로 그는 검찰청에 자신의 밀항미수 사실을 자수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결코 굴하지 않고 다른 수감자와 간수들에게 맹자를 가르쳤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일본 정부에 의해 2년 만에 그를 석방하기에 이른다.
감옥을 나온 28살의 요시다 쇼인은 젊은이를 교육시켜 미국으로 보내기로 마음먹고 송하촌숙(松下村塾)이라는 작은 서당을 만들었다. "나와 함께 일본의 미래를 공부할 사람은 모여라”라는 구호 아래 19~24세의 청년 13명이 모였다. 이들 중에는 19세의 이등박문(伊藤博文, 이또 히로부미)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 모두는 후에 명치유신의 주역이 된다. “죽어서 불후(不朽)가 되려거든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말 것이며, 국가를 큰일을 하려거든 오래 살아라." 라는 내용이 요시다 쇼인이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전부이다. 장수(長壽)하면서 조선과 만주를 손에 쥐는 등 일본을 위해 큰 일을 해냈던 이등박문은 스승의 가르침 그대로이며, 일본에서는 영웅과 다름없는 존재이다. 요시다 쇼인의 또 다른 가르침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려면 빨리 죽어야 하겠지만, 대신 하늘 높이 날아 올라 긴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 보고 눈 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을 가슴에 안으라(高飛長目)”는 것이었다. 학문이라는 것은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칭하여 우리는 이를 호연지기(浩然之氣)라 부른다.
1868년 이들 13명의 주역이 이끈 명치유신이 완성된다. 송하촌숙(松下村塾)이 세워진 지 16년 만의 일이다. 그러나 16년이 걸려 명치유신이 완성되면서 일본이라는 전혀 새로운 나라가 탄생한다. 그전에 1855년 30세의 요시다 쇼인은 교육내용 때문에 사형을 당한다. 그러나 명치유신이 끝나고 들어서 명치정부에서 13명의 학생 중 3명이 총리가 되고, 6명이 대신이, 나머지 명치정부 초기에 총살당한 4명은 불후(不朽)가 되었다. 아직도 일본 초등학생들이 존경해 마지 않는 "다카스키 신사꾸"가 이 네 사람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아이들에게 비전, 꿈을 심어준다는 것은 다시 말해 도덕적 용기를 심어준다는 것과 같다. 도덕적 용기라는 것은 바로 호연지기이다.
명치유신이 끝나고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아직 일본에는 그것을 받아들일만한 그릇이 없었다. 이 필요에 의해 같은 해 일본에는 사립대학이 생긴다. 지금 일본 만엔 지폐에 초상이 실린 후꾸자와 유기치(福澤諭吉)(1834∼1901)가 36살의 나이로 경응대(京應大)를 설립하여, 서양문물을 받아들일 그릇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곳의 젊은이들은 르네상스와 같은 외래어를 문예중흥과 같은 말로 바꾸었다. 인민(人民 people), 공화국(共和國 republic), 물리(物理 physics), 생물(生物biology) 등은 모두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한자로 쓰지만 사실 일본어이다. 이 중에서 가장 알기 쉬운 예가 바로 로맨티즘(romatism)이다. 그들은 로맨티즘을 낭만주의(浪漫主義)라고 번역했고, 낭만은 일본어로 로망이라 발음된다. 우리가 이 단어를 수입하자 낭만과 로맨티즘 사이엔 그 어떤 연관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우리가 쓰고 있는 많은 단어들은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조어(造語)이다. 이것이 바로 일본 젊은이들이 모여서 노력했던, 정신적 근대화의 과정이다.

도덕적 용기의 발로 : 호연지기
요시다 쇼인이 13명의 젊은이에게 심어준 호연지기란 하늘에 흐르는 기를 우리가 갖는다는 뜻으로, 지금 우리의 자녀와 손주들에게 키워주어야 할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한학자여서 어려서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배우고 지금도 대학, 소학, 시경을 외운다. 이것은 단순한 공부가 아니고 그 안에서 우리가 사는 진리를 볼 수 있다는데 의의가 있다. 조선시대 선비의 가장 큰 덕목은 바로 지행(知行)이다. 배우고 익힌 바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그는 지식인이 되지 않는다. 이런 것을 우리는 바로 고전에서 배운다.
그 중에서 오늘의 핵심인 호연지기를 국어사전에서 찾아 풀면 다음과 같다.
"공명(公明)하고 정대(正大)해서 누구를 만나도 꿇림이 없고, 이때 생겨나는 것이 도덕적 용기(道德的 勇氣)이다."
이 도덕적 용기를 갖춘 사람을 가리켜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있다" 라고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호연지기가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조선시대 임금은 신하들과 경연(競演)을 하는 중에 민정(民政)을 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기상으로 인한 홍수나 가뭄 등의 원인을 물었을 때, 그 모든 신하들은 "임금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늘이 노하여 이런 재해가 생긴다" 라고 대답한다. 이에 임금들은 노하기는커녕 점잖게 바른 정치의 길을 묻는다. 신하가 말하기를 "소인(小人)과 군자(君子)를 구별해야 한다. 소인과 군자는 원래 구별이 안 된다. 큰 소인은 군자처럼 보이고, 큰 군자는 소인처럼 보인다." 이렇게 거침없는 대화가 가능했던 까닭이 바로 "도덕적 용기" 인 것이다. 지금 기업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였을까? 부하직원의 솔직한 의견에 화를 내는 자는 리더의 자격이 없다. 또 다른 도덕적 용기의 예를 들어보자.
매천 황현(梅泉 黃玹) 선생은 전남 구례에서 서울에 한번도 와보지 않고, 들려오는 소문만으로 "매천야록(梅泉野錄)" 이라는 근대사를 써냈다. 1910년 한일 합병에 매천 황현 선생은 55살의 나이로 음독자살을 하였다. 그는 유서에 "나는 지금 죽어야 할 의리가 없다. 그러나 주자(朱子)를 가르친 지 오백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망하는데 한 사람쯤 죽지 않는 것도 희극이다. 나는 이 하늘의 뜻을 간직하기 위해 통쾌하게 이 길을 간다."
라고 그 뜻을 남겼다. 이런 것을 바로 도덕적 용기라고 한다. 이것은 학문으로 되지 않는 호연지기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우리 청소년에게 바로 이 것을 길러 주는 것이 정신적 근대화의 시작일 것이다.

다시 찾아 온 정신적 근대화 기회 : 이동인
일본보다 13년 늦은 1866년, 대동강 중류까지 올라온 제너럴 셔먼 호가 평양 수비군에 의해 침몰하고 만다. 그리고 그 해 7월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대원군을 응징하기 위해 프랑스 함대 5척이 현재의 마포대교와 양화대교에까지 정박하였다. 당시 15세였던 조선말의 개화승인 이동인(李東仁)은 이것을 보고 일본으로 밀항하기를 꿈꾸었다. 드디어 28살 때 경도(京都)로 밀항했던 이동인은 뛰어난 지식과 일본어 실력으로 같은 해 동경(東京)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그는 경응대의 후꾸사와 유기치를 만나 유길준과 윤치호를 경응대에 입학시켰으며, 당시 일본 최고위층과 교류하였다. 후꾸사와 유기치의 소개로 영국공사관 어니스트 사토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에 사신로 온 김홍집을 대신하여 유창한 일본어로 공식적인 기자회견을 통해 부산항구에 들어오는 일본 선박에 세금을 걷고, 조선에서 나가는 쌀에 대한 관세를 매기는 등 조선 정부의 뜻을 모두 이루었다. 그리고 이동인은 김홍집을 따라 일본어로 쓰여진 양서 400권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당시 양서는 금지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몸담고 있는 봉언사와 암자에 나누어 보관하고 밤마다 조선의 깨인 젊은이들은 그 책을 몰래 탐독했다. 그들이 바로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홍영식, 서재필 등이다. 서재필 선생은 자서전에 그 때의 경험을 남겼다.
"이동인 선사가 일본에서 400권의 책을 가져왔는데, 그 책들을 읽으면 사형을 당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깊은 밤을 이용하여 그 책들을 읽었다. 일본어로 되어 있었지만, 한자가 가나보다 더 많아서 능히 완독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사람들은 우리는 개화당이라 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김옥균, 서재필 등을 개화세력으로 이끌었던 사람이 바로 이동인이었던 것이다.
이런 업적으로 고종을 만난 이동인은 고종의 신임장을 얻어 일본으로 돌아가 어니스트 사토를 만나 조선의 군함 구입 및 영국 국비유학 등을 요구하고 여러 정보를 수집하여 31살이 되던 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다. 이때 조선은 예조판서가 외무부 장관으로, 이조판서가 내무부 장관이 되는 등 정부 조직에 변동이 있었다. 고종이 이동인에게 외무부 장관을 건의하자, 당시 승려를 중인으로 격하하던 조선 양반의 풍조는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에, 이동인은 그날 창덕궁에서 나오다가 영원히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때가 1882년으로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가에 온지 16년 만의 일이다. 일본은 이 처음 서양 배를 보고 나라를 완전히 개혁하는데 16년이 걸렸지만, 한국은 불행하게도 서양 배를 보고 가장 선각자였던 사람을 죽이는데 16년이 걸렸던 것이다. 바로 이 차이가 우리가 일본과 경쟁하기 힘든 이유의 출발이다.

한국의 근대화
반도체와 휴대폰으로 세계1위라는 한국의 송곳을 사용해 보았는가? 일본은 사용수준에 맞추어 송곳까지 세분하여 생산하지만, 한국의 송곳은 손잡이는 물론 그 쇠로 된 부분까지 휘어지는 모습을 본다. 기초공업이 되어있지 않다는 뜻이다. 20년 전 불고기용 가위를 따로 디자인해서 만들자는 칼럼이 있었지만, 아직도 우리는 양복을 재단하고 집에서 사용하는 일반 가위로 음식을 자른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상황이다.
나는 1953년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6학년 선생으로 부임했다. 당시 56명의 학생 중에 18명이 영양실조로 버짐이 있었다. 도시락을 싸오는 학생이 8명뿐이다. 그때 전세계의 캐치프레이즈가 바로 "한국의 전쟁고아를 돕자." 였고, 미국에서 드럼통에 탈지분유를 보냈는데 그것은 미국의 소가 먹는 사료였다. 이것이 바로 50년 전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렇게 자만하고 있다. 놀라지 말라. 초등학교는 물론 중학교에도 국사라는 과목이 없다. 고등학교에서는 국사가 선택과목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대한민국의 어린아이들은 국사를 한 줄도 읽지 않아도 서울대에 입학할 수 있다.
10년 전 고등고시에는 국사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태어나서 조국의 역사를 한 줄도 읽지 않아도 판사, 검사가 될 수 있는 것이 한국이다. 세계에 이런 나라는 없다. 이런 나라가 성할 수 있을까. 일전에 교육인적자원부 차관보에게 공개적으로 질문을 했다.
"왜 국사를 가르치지 않는가?"
"국사를 가르치면 국수주의적인 발상을 하게 된다."
라는 것이 행정 차관보의 대답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을 바꿀 수 있는가?

한국의 정신적 근대화를 위한 조언 : 호연지기(浩然之氣)
세계은행의 공식적 발표는 중국의 GNP가 2009년 1만 달러가 되고, 2020년에는 중국의 경제가 미국의 경제를 앞지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2020년 한국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은퇴시기가 빨라진 17년 후에는 모두 은퇴를 할 것이다. 그때 한국의 자동차와 컴퓨터를 팔고 한국을 이끌 30대의 청년들은 바로 지금 초등학교 3학년에서 중학교 3학년에 있다. 이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호연지기 뿐이다. 공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꿈을 심어줄 큰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그 꿈이란 한국 국민의 정체성을 깨우칠 수 있고, 대한민국의 진로와 비례할 수 있는 비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이 것 하나뿐이다.
청학동 여름학교는 입학경쟁률이 10:1에 달하고, 제대로 된 가통을 지닌 가정은 반드시 그 곳에 보낸다. 졸업식에 배운 것을 확인하는 동안 종아리에서 피가 나도록 회초리를 치지만, 그 것을 보고 항의하는 어머니들을 볼 수 없다. 서울시내 학교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은 우리 어머니들이 어떤 것이 진정한 교육인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째서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 여러분께 선물을 하나 하고자 한다. 어려운 한자가 아니니 외웠으면 한다. 율곡 이이 선생이 아이들 교육, 여러분 스스로의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지 16자로 정리했다.

수기공부(修己工夫) – 나를 닦는 공부는
유지유행(有知有行) – 많이 알고 많이 실천하기 위해서 하느니라.
지이명선(知以明善) – 아는 것은 훌륭하고 선한 것을 알기 위함이다.
행이성신(行以誠身) – 행동하는 것은 정성을 다하는 몸을 만들기 위함이다.

이를 성인이 되는 학문, 성학(聖學)이라 한다. 조선 시대 가장 중요시 여긴 것은 바로 지행(知行)이다. 배우고 익힌 바를 몸소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이야기 할 때, 역사는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정치를 잘 하려거든, 지난 시대의 지란의 자취를 살펴보라, 지란의 자취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역사를 읽는 길밖에 없다." 라고 남긴 바 있다. 공론, 여론이란 무엇인가? 옛말에 여론이 정부에 있으면 다스려지고, 여론이 항간에 있으면 혼란해지고, 여론이 정부에도 항간에도 없으면 나라는 망한다라고 했다. 제대로 된 인재 기용이 올바른 정치를 낳는다는 것이 457년 전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여러분 또한 시간이 날 때마다 역사를 읽을 수 있길 바란다.

진정한 리더십 : 세종대왕의 인재발탁
마지막으로 오늘의 주제인 "성공한 왕, 실패한 왕"의 한 구절만 이야기해 보자.
얼마 전 세계를 경영하기 위해 히딩크 리더십을 배우자는 분위기가 강했다. 히딩크가 무슨 인재를 선발했는지 물었을 때, 사람들은 송종국과 김남일을 들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축구선수였다. 축구감독이 축구선수를 발탁한 것이 무슨 인재선발인가? 축구를 하지 않는 사람을 발탁하여 축구선수를 만든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세종대왕이 과학을 진흥하고 싶어, 손재주 있고 머리 좋은 인재를 하나 찾고자 했다. 모래밭에서 모래알을 고르는 것과 같았지만, 관노의 아들 장영실(蔣英實)을 찾을 수 있었다. 천하디 천한 신분의 장영실을 다듬어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장려하여, 장영실은 마침내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들어 냈다. 1473년 경복궁 흠경각에 자연을 축소하여 방 전체에 시계를 만들기도 하였다. 바로 이런 것을 발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를 위한 발전을 밖이 아닌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하고, 그 것은 역사를 앎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정신적 근대화를 위해 우리 아이들을 위한 호연지기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원고는 지난 5월12일 제16기 경영자독서모임에서 진행되었던 신봉승 교수의 강의를 바탕으로 IPS에서 작성한 것입니다.



원희경 연구원(교육본부) hkwon@ip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