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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영자독서모임으로의 초대17-한국 자본주의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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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지식인들은 자신의 지식을 과신하여 과욕과 횡포 등 온갖 형태의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있다. 신문사 사장이 수재의연금을 가로채고 증권사 CEO가 사기행각으로 구속되는가 하면 정치인, 세무관료, 법조인, 재벌의 변칙상속 등 물질과 이익에 관련된 추문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 지식인의 시대정신 결여가 지니는 기회비용은 정말 엄청나다. 부정하게 오가는 돈을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기술 산업이나 벤처기업에 투입하였다면 벌써 선진경제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 돈이 은행을 멍들게 하고 산업정책을 왜곡시키며 사치와 낭비, 경상수지 적자를 초래한 역작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게다가 이 돈을 정치인들이나 관료, 은행가들이 나누어 먹는 구조와 행태가 엄존하면서 국가관리 기능을 마비시킨 손실도 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 때문에 야기된 사회질서의 혼란과 불신풍조, 냉소와 방관, 윤리와 가치관의 파괴, 나라 망신은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정신적 손실이다.

자본주의란 여러 정의가 있지만 그 공통적인 핵심은 개인의 물질적 이익 추구, 즉 이윤 추구와 사적 소유의 욕망을 법적, 사회적, 가치관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개인이 마음대로 기업활동을 해서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축적하는 것이다. 맨더빌은 ‘자만과 허영, 탐욕과 낭비가 다른 모든 선을 합한 것 보다 훨씬 많은 병원을 지었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악덕으로 여기는 자만과 허영, 탐욕과 낭비와 같은 것들이 오히려 경제적으로 훨씬 많은 기여를 한다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도 공리주의와 공감(sympathy) 등으로 한계를 설정하고는 있으나, 개인의 물질적 이기심을 인정하였다. 남의 동정과 감정이 인정되는 범위에서는 어떤 경제적인 악의 행위를 해도 관계없다는 말이다. 어떤 가치도 다 배제하고 기업은 시장가치를 중시하고 경쟁과 자유를 모토로 하는 어떤 형태의 경제활동도 관계없다는 것이며 그것은 아주 적나라한 경쟁사회를 의미한다. 이것이 과연 좋은 가치인가 의문을 가지게 되지만 사실은 그것 때문에 경제가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상이 최근의 신자유유의, 미국적 가치로 이어지면서 세계 경제를 지배하고 있다.
사실 근대 이전만 해도 성 아우구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 플라톤의 세속욕구의 포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아집과 이기심의 중용적 억제, 공자의 극기복례와 호연지기, 주희의 인의예지의 사단적 본연성, 예수의 사랑, 석가모니의 현세초극, 노자의 無사상 등은 이러한 물질의 욕망을 부정했고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막스 베버가 ‘단조롭고 재미없으며 때로는 더럽고 지저분하다’고 말한 경제활동을 아담스미스가 사실적, 제도적, 정책적, 법률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그 때부터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의 시동을 걸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획기적이고 매우 중요한 계기이다.
아담 스미스는 그러한 지저분한 경제활동이 종교적 토대를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지 못했다. 막스 베버는 그 두 가지 개념을 연결하여 산업 자본주의의 정신과 윤리를 내세우면서 처음으로 물질과 정신을 양립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는 맨더빌과 스미스를 넘어선, 중세와 근세를 넘어선, 지금의 주류경제학을 넘어선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단조롭고 재미없으며 때로는 더럽고 지저분한 경제행위가 어떻게 경제적, 정신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을까. 막스 베버는 “고독과 불안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이 세속생활을 영위하면서 자신의 직업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절약과 부의 축적을 징표로 삼는, 이른바 청교도정신이야말로 이른바 자본주의적 정신이다”라고 하였다. 기업인들이 부를 축적하는 것이 종교적으로 신이 인정하는 하나의 축복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중세의 종교사상을 뛰어넘는 혁명적인 이야기였다. 막스 베버는 경제적 부의 축적에 도덕적 •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할 때, 그것도 외부의 강제나 법이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가치의식에 의해 동기지어질 때, 더 나아가서 이러한 내면적 가치의식이 개인 뿐 아니라 사회 일반의 윤리규범으로 객관화되어 금욕주의가 사회적 문화가치로 정착될 때 비로소 자본주의적 경제체제가 정상적 기능을 하게 된다고 보았다. 기업인들이 자기 직업을 소명으로 알고 금욕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면 개인도 신이 인정하는 축복을 받게 되고 나아가서 자본주의 경제 전체도 흥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정상적 기능을 하게 되는 가장 기본적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오늘의 자본주의 정신은 베버가 말하는 금욕을 넘어서고 있다. 산업 자본주의에 필요했던 금욕만으로는 오늘의 경제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 이제는 금욕 이외에도 정직, 신뢰, 질서, 투명, 형평, 협력, 창의, 공동체 윤리 등이 아시아적 가치와 모델로 이어지고 있고, 이기와 이윤 추구도 경쟁, 경영, 시장, 기술과 같은 구미 가치와 모델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양립될 수 있는지, 어떤 정신과 미덕이 부의 창출과 양립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난제로 남아 있다.

한국 자본주의 정신, 이래야 한다

한국에는 자본주의의 정신이 없다. 지금까지는 ‘잘 살아 보자, 하면 된다’고 하는 두 가지 단순명제만을 제시해 왔지만 이제부터는 더욱 더 우리에게 맞는 정신이 필요하다. 베버가 말하는 금욕은 산업 자본주의를 두고 한 말이다. 베버의 업적은 참으로 위대하나 인간의 창조력과 창의성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비판되고 있다. 교황 바오로 2세는 [회칙 100주년]에서 ‘인간의 중요한 자원은 인간 자신이다. 인간의 지성과 노동의 상호 협력하는 과정에는 근면, 열성, 분별, 신뢰, 충실, 결정, 용기 등이 필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창조력이 중요하다. 창조주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자기들이 일생동안 소비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창조할 능력을 각자가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금욕만이 전부가 아니라 인간이 창의성을 발휘할 때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는 것이다. 인간 역사상 가장 높은 IQ를 가지고 있다는 괴테 역시 [파우스트]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물이며 인간도 창조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지식산업화 사회로 들어서면서 인간의 창의력은 더욱 중요해 지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가 안정하고 발전하고 도덕적인 사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본 경제는 명치유신 이후 32년이 지나 1900년에 들어서는 시기에 급성장을 한다. 그것은 일본 자본주의의 정신, 즉 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2차 대전 이후 황무지에서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된 것이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지금은 EU경제와 미국경제, 일본경제가 세계 3대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다. 1억2천만 일본인구가 훌륭한 업적을 세운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를 일본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에는 기독교 정신과 전혀 다른 번자본주의가 있다. 이 번을 어떻게 경영하는가에 일본적 네트워크 자본주의의 정신이 있다. 이것이 부번주의, 부국강병, 식산흥업, 국철일가, 회사주의, 일본 주식회사 등으로 연관되면서 일본의 경제발전을 이룩해 왔다.
외부에서는 한국이 1960년대 이후 단기간에 이루어낸 상당한 발전을 보고 한국에도 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라 사실상 아직은 한국 자본주의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뉴 밀레니엄에 진입하는 이 중요한 때에 한국은 ‘한국정신을 가진 한국 자본주의’가 되어야 한다. 마치 성공한 유럽 여러 나라들이 각자의 문화에 걸맞는 기업구조와 경영형태,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있듯이, 또한 동아시아의 일본, 싱가폴, 대만 등이 각자의 자본주의를 형성하고 있듯이, 우리도 그간 용해되고 침전된 전통적 정신과 새로운 정신의 장단점을 식별하고 기업구조와 경영행태를 개작하여 한국적 의(義)와 리(利)가 양전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 속에도 조선왕조의 임상옥과 최근의 유일한과 같이 義와 利를 겸비한 한국인들이 있다. 그들의 정신을 한국 혼으로 일반화시키면 된다. 무엇보다 우리 젊은이의 시대 정신을 올바르게 키워 나가야 한다. 지금 우리 청소년들의 의식과 가치관은 대단히 유동적이고 갈림길에 서있으며 특히 지금의 대학은 혼란에 빠져 있다. 하루 빨리 영리함(cleverness)보다는 지혜(wisdom)를 지닌 학생들이 배출되도록, 이상적 인간상을 지닌 젊은이들이 나라를 이끌도록 개혁하고, 거기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정직, 상생, 창의를 익히는 교육을 지금 바로 시작하자. 이런 정신을 지닌 학생들이 사회에 배출된다면 한국의 10년 후는 분명 크게 밝아질 것이다.

정리 윤지영 연구원 jyyun@ip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