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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영자독서모임으로의 초대13-다시 한국의 지식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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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 행정부의 초기 노동부 장관을 역임한 라히가 했던 연설 가운데 인상적인 것이 있어 소개하려고 한다. ‘20세기 지식기반 사회에서 사람들은 지식을 Know-how의 차원에서 보는데 진실로 새 천년을 맞이하여 국가와 사회발전을 도모하려면 Know-why를 생각할 때’라는 것이다. 하나의 Know-how를 Information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Know-why는 지혜에 해당되는 메시지가 있는 이야기이다. 정보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정보의 홍수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정보가 넘쳐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의미있는 메시지를 얻기는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 Know-how 차원에서 눈물이라는 것을 보면 물과 소금이다. 그러나 이 눈물은 물과 소금으로 끝나지 않는다. Know-why, 즉 의미있는 메시지의 입장에서 보면 이 속에는 부모의 사랑, 동정, 감동과 같은 것이 있다.

가장 심각한 사회적 질병(Social illness)은 한반도의 분단과 남북 대결에서 온 것이다. 즉 우리 사회의 사회적 질병은 증오, 대결, 대립을 합리화시키는 냉전구조와 문화에 있다. 냉전이 오래 지속되면 서로의 인격을 파괴한다. 냉전이라는 것이 인간관계에 이렇게 좋지 않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남북간의 냉전관계는 50년이 되었다. 냉전이라는 것은 독선적 사고, 단색적 사고, 닫힌 사고이며 자기와는 다른 것은 전부 색깔을 칠하는 사고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기본적으로 위배된다. 열린 사회, 열린 학교, 열린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냉전문화부터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사회적 질병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첫째, 냉전문화가 사회적 질병의 기본이다. 둘째, 인권과 평화, 자유와 복지 등의 가치를 추구하려는 온갖 개혁을 훼손시키고 어렵게 하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독재적 체제, 독재적 정치가 질병이다. 셋째, 우리나라의 정치·경제·문화적 엘리트들은 모두 밑바닥 사람과 함께 아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한국의 지식인들은 밑바닥 인생과 같이하지 않는가. 왜 한국의 정치인들은 표 얻을 때 빼고는 같이 아파하지 않는가. 공감할 줄 모르는 엘리트가 지배하는 사회, 국가, 민족은 사회적 질병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왜 평화와 통일을 이야기하는가

나는 8.15를 맞을 때마다 분단의 억울함에 몸서리친다. 특히 우리가 6.25 전쟁을 치르는 사이에 일본의 경제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민족적·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낀다. 6.25 때문에 느끼는 울분의 핵심은 ‘왜 우리는 어리석게 분단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단순히 국토 분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분단된 남북간의 반세기 동안 냉전을 거치는 사이에 엄청난 죽음과 죽임이 있었다. 냉전 유지비용은 엄청나다. 엄청난 국방비 이외에도 서로 증오하는데 남과 북이 쏟은 비용을 생각해 보자.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과서까지 서로 냉전증오를 합리화하기 위한 문구를 만드는데 쓰는 비용을 생각해 보자. 그것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감옥해서 병을 얻어서 그것을 치료하는 비용까지 생각해 보자. 이러한 것들이 모두 냉전 유지비용이다.

지금까지는 봉쇄정책, 흡수정책, 멸공정책, 북진정책 등 어떻게 상대를 부시던 간에 공통적으로 북한은 북한대로 우리는 우리 식으로 냉전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상대방의 자율성은 인정하지 않고 상대를 초전박살내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부터 노태우 정권까지 모든 대북정책은 실패했다. 그 이유는 남북관계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탈냉전의 조치가 담겨 있었던 노태우 정권의 남북기본합의서도 아무런 실효가 없었다. 북한을 주적으로 보지 않고 동반자로 본다는 인식에서부터 상당히 새로운 패러다임이 숨어 있었으나 실천이 되지 않았다. 그 때의 동방정책의 핵심은 베이징을 우리의 우방으로 끌어 안음으로써, 모스크바를 우리 우방으로 30억불 주고 끌어 안음으로써 북한의 목을 조르는 정책이었다. 말은 남북기본합의서라는 멋진 문건이었지만 그것을 실천할 의지는 없었다. 오히려 북한에게 핵개발의 유혹을 느끼게 하였다. 이제는 긍정적인 게임을 해야 한다. 엄청난 냉전비용을 평화비용으로, 번영비용으로, 경제비용, 복지비용으로 전환하기 이를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틀을 바꿔야 한다. 이전까지의 모든 정책을 이솝우화의 강풍정책으로 요약한다면 이제는 햇볕정책을 통해서 이것을 녹여야 한다.

2000년도에 와서 불과 넉달 전에야 6.15 선언으로 드디어 우리 민족사는 세계사의 온당한 평화 흐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이런 말을 했다. ‘Hermit Kingdom(은둔자의 왕국)이었던 북한이 6.15 이후에 Hyperactive Kingdom으로 바뀌었다.’ 그 며칠 후 북한의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미국 국방장관 올브라이트가 만찬을 베풀면서 한 이야기가 ‘What was frozen can thaw, and what has been contesting ground can overtime become common ground’ 즉, 얼어붙은 것은 녹을 수 있고 대결의 마당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동의 광장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올브라이트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매우 의외의 일이다. 이것은 이 책에서 이야기 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다. 세계사를 이끌고 있는 미국 및 유럽의 각 나라가 ‘얼어붙은 것은 녹을 수 있고 시간이 지남에 대결의 장이 공동의 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역사상 현실이다. 냉전세력들은 증오 때문에 현실을 보지 못한다. 증오는 현실을 보지 못하도록 왜곡시키는 잘못된 색깔의 안경이다. 이러한 화해협력정책은 이전까지의 실패와 세계사의 흐름을 감안하고 북한의 합리적으로 파악하는 가장 현실에 적합한 정책이다.

6.15는 6.25를 대치하는, 민족사의 흐름이 세계사의 탈냉전 흐름과 합류하게 되는 큰 사건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북한의 현실을 강조하면서 남과 북의 힘의 비대칭관계를 현실적으로 고려할 때 가장 현실적인 대북정책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여기서 힘이란 사상이나 군사가 아니다. 우리가 미국과 힘을 합치면 절대 북한의 군사력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나 경제적 측면에서는 북한이 우리의 30분의 1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러한 힘의 비대칭을 고려해야 한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자. 사상은 그들이 우위이고 군사와 정치는 비슷하나 경제가 너무 취약하기 때문에 전쟁을 해도 이길 수 없다는 두려움이 북한의 엘리트 속에 생기기 시작한다면 북한이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체제적 위기를 어떤 방법으로 극복하겠는가.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군사력으로 대처할 것이며 여기서 군사 모험주의가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현실 합리적인 냉혹한 정책은 북한을 안심시켜 자폭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북한이 자폭하게 되면 중국, 미국, 러시아 등 좋아할 주변국가는 하나도 없다. 그러한 배경에서 ‘연착륙(Soft landing)’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런 여러 가지 북한의 현실을 감안해서 나온 것이 햇볕정책, 화해협력정책, 포용정책이다. 남북한의 냉전적 대결이 우리 민족간의 비극으로 끝난다면 역사적 무게가 덜 하겠지만 한반도 남북간의 대결은 아시아 전역, 동북아 지역의 안정과 평화에 결정적인 위해 요소가 된다. 한반도의 냉전대결이 아시아 전역의 안정과 평화, 번영에 위해요소가 된다는 것은 곧 세계평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풀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이 더 무게를 가지게 된다.

개혁, 멈출 수 없는 시대적 소명

개혁이나 혁명은 모두 전쟁이다. 넒은 의미에서 보면 개혁은 사상적, 정치적, 때로는 국가적, 사회적인 전쟁이다. 反개혁, 反혁명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혁명은 개혁보다 쉽다. 反개혁분자를 제거하는 살생부를 만들어 처단하기에도 좋고 혁명 자체가 법을 뛰어넘는 행동이므로 적법한 절차를 따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혁명이란 혁명세력, 反혁명세력이 구분된다. 즉 전쟁의 진영이 명확하게 구성되므로 어디를 쳐야 할지 구별이 된다. 그러나 개혁은 다르다. 개혁은 내 편인지 저쪽 편인지 전혀 알 수 없으므로 진지 구축도 되지 않는다. 때로는 적과 같이 아군이 되어 있기도 하고 뭐가 개혁인지 反개혁인지의 깃발도 선명치 않다. 反개혁도 상황이 바뀌면 반드시 개혁을 앞세우므로 개혁이라는 말을 믿을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개혁은 혁명과 달리 반드시 적법적인 절차를 밟아야 하므로 시간이 걸린다. 적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적과 거리를 두고 협상해야 하고 따라서 성과가 나기 어렵다. 개혁이 혁명보다 몇 배 어렵다는 것을 모르고 개혁을 한다는 것은 벌써 개혁에 실패한다고 볼 수 있다. 어렵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그것을 실천할 수 잇는 전략과 전술을 짤 수 있는 것이다. 개혁을 새로 비유해 보자. 새가 높이 날려면 몸통이 튼튼해야 한다. 큰 몸통이 있어야 하고 균형 잡힌 큰 날개가 있어야 한다. 몸통은 개혁의 주체인 시스템이고, 개혁은 반대하는 사람도 끌어 안을 좌우 날개를 달아야 한다. 두 날개가 비슷한 길이가 되어야 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몸통도 없고 날개도 각각이다. 날개의 길이가 다르면 한 방향으로 갈 수가 없다.
만델라의 유명한 명언이 있다. 우리는 우리를 핍박했던 사람을 껴안고 정치를 해야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진실규명만이 과거를 영원히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근대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연합해야 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찬성하나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근대화 세력이 민주화 세력을 감옥에 넣고 인권을 유린하고 의문사를 일으킨 사실에 대해서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 진실을 밝히는 경우에 형사책임을 물어서는 안 되며 그것으로 화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규명이 없다. 보복적인 차원에서의 진실규명이 아니라 화해로 가기 위한 진실규명이어야 한다. 이런 과정이 있어야 개혁의 양 날개로 뜰 수 있는 것이다.

희망의 21세기를 위하여

정보화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가치가 있다. 이 가치는 냉전적 가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냉전근본주의(Fundamentalism), 닫힌 생각, 나와 다른 것은 색깔을 칠하고 원수를 만드는 생각으로는 사업을 할 수 없다. 시장(Market)에서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내가 만드는 제품을 사는 소비자이다. 내 자식에게는 10원을 받고 원수에게는 100원을 받는다면 시장은 무너진다. 시장의 논리는 그런 의미에서 합목적성, 합리성을 띄어야 한다. 시장의 경쟁력을 강조하는 정보화 시대에 있어 4가지 가치가 매우 중요하다. 첫째는 창발력(Creativity), 둘째는 투명성(Transparency), 셋째는 관용(Tolerance), 넷째는 연대성(Compassion)이다.

첫째, 창발력 측면에서 이야기 해 보자. 세계 유수 잡지들이 선정하는 지난 천년간 인류 역사를 움직인 사람들의 명단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사람들은 구텐베르그, 갈릴레오, 코페르니쿠스, 뉴튼, 다윈 등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창발력이다. 창발력은 질문이 있을 때 비로소 생긴다. ‘사과나무에서 어떻게 사과가 떨어질까’ 뉴튼적인 질문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바보스러운 것이다. 우리와 같은 교육에서는 뉴튼과 같은 사람이 배출될 수 없다. 뉴튼이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고 만류인력의 법칙이 실용화 되지 않았던들 오늘의 문명의 이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둘째, 현대는 투명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대이다. 현대나 대우의 위기가 모두 이런데서 왔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관용은 좋은 것이 좋다는 융통성과는 다르다. 원칙을 무시하는 이완용식 융통성은 역사에 모범이 되지 않다. 관용이란 인류의 공통적 가치, 즉 인권, 평화, 복지, 자유를 존중하는 터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넷째, 공감에 대해서는 이야기 해 보자. 한국 교육의 목표는 실제로 사람다운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이 아니라 서울대에 입학하는 요령을 터득하게 하는 것이다. 서울대가 갖는 헤게모니는 세계에 유래가 없다. 한국의 모든 부모들은 어떻게 하면 자식을 서울대학에 보내느냐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고 서울대는 곧 출세를 보장한다고 생각한다. 교육의 목표가 사람 되는 것, 창발력 있는 것, 투명성을 보장하면서 경영하는 것, 관용하는 것, 공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요령있게 암기능력을 극대화시켜서 서울대에 입학하는 것이 최대 목표이다. 서울대에 들어간다고 해서 창발력이 뛰어나지 않다. 창조력과 인간관계 좋은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거나 오히려 반비례 쪽이다.

우리는 뉴튼적인 발상을 서울대 입학교육이라는 것을 통해 근원적으로 잘라낸다. 자녀의 소질이 무엇인지는 불문에 붙이고 점수를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우리 교육은 천재적인 발상을 싹둑 잘라 버린다. 한국의 초등학교 숙제는 숙제가 아니라 고문이다. 창조적인 스트레스가 아니라 非창조적인 스트레스이다. 한국 교육의 생산성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그렇게 우수한 사람들이 모인다는 서울대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참다운 인간이란 창발력을 기르고 투명성을 보장할 수 있는 관용과 공감의 사람이다. 시장경제체제 하에서 social weak(사회적 약자)는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적자와 非적자가 있다.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공감하면서 그들을 보호해 주는 안전망 장치는 역시 정보화 시대에도 국가와 기업이 담당해야 한다.

한국의 자본가들에게

한 때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좌파 운동권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심한 공격을 했다. 그 때 운동권 학생들은 ‘한국 자본주의의 건전한 육성에 저해조건이 되는 것은 운동권 학생들이 아니라 자본가 자신’이라고 했다. 뉴욕 거리를 걸으면서 아무에게나 록펠러나 카네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He was a great guy’라는 대답을 쉽게 들을 수 있다. 미국은 자본가를 경멸하지 않는다. 카네기, 록펠러와 같은 옛날 미국 자본가들은 생전에 번 돈을 사후에 사회에 깨끗하게 환원했다. CNN의 소유주인 터너, 빌게이츠 등 지금 세계를 움직이는 자본가들은 죽어서 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존경받는 자본가로 인해 미국의 자본주의가 건전하게 클 수 있고 자본주의가 보호된다. 한국도 존경받는 자본가들이 자본주의를 보호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졸부는 있지만 淸副는 없다. 우리나라에도 淸副의 모범들이 여럿 나와야만 한국의 자본주의가 건전하게 육성될 것이다. 국민들로부터 평가받고 사랑받는 깨끗한 부의 모범을 보여 줌으로써 한국의 자본주의는 이 땅의 자본가들이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

- 이 원고는 한완상 총장의 강의를 바탕으로 산업정책연구원에서 작성한 것입니다.-

한완상 총장(상지대 / 전 부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