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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영자 독서모임으로의 초대9 : 빅딜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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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딜(BIG DEAL)'이란 이미 완료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다. 이 책은 빅딜의 의사결정 과정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그것의 취재 과정에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만을 기록해 놓은 것이며 가능한 한 많은 당사자들을 만나 확인하고 보도된 과정을 찾아 '사람' 중심으로 기술하려고 노력하였다.

재계에서 싹튼 '사업교환'

많은 사람들이 빅딜 아이디어가 처음부터 정치권이나 정부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 이 아이디어는 재벌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1997년 12월 18일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당시, 우리나라는 외환위기로 금리가 20%까지 치솟고 환율도 2,000원을 넘나드는 등 IMF 관리체제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당선자에게는 하루아침에 빈사상태에 빠진 경제에 대한 적절한 응급처치와, 하루하루 결제자금이 몰리는 외환위기의 조속한 수습이 발등의 불이었다. 한편, 위기의 당사자였던 기업들도 IMF가 공공연하게 재벌해체를 주장하는 탓에 설상가상으로 난국을 헤쳐나가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실제로 '6·25 이후 최대 국난'이라는 표현이 무리가 아닐 정도로 경영환경은 최악이었고 한국 경제의 앞길은 어둠과 안개 속이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정부와 IMF의 협약 직후부터 10여일간 위기극복 방안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여 12월 10일 즈음에 대외비 보고서를 완성시켰는데, 여기서 그들은 주요 그룹끼리 적자사업이나 지속하기 어려운 사업을 맡아주는 방식의 구조조정안을 제안하였다. 즉, 주요 그룹들의 사업이 중복돼 있는 만큼 총수들끼리 모여 지속하기 힘든 사업을 서로 주고받는 상생(相生) 차원의 구조조정 방식을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만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실제로 1980년대 초반 전경련에서 이 사업교환을 시행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도 지금과 같은 극심한 불경기로 역시 과잉중복투자가 문제되어, 당시 전경련 회장에 의해 4대그룹 총수간의 사업교환 방식이 거론되었으나, 다시 경기가 좋아지는 바람에 전면 백지화가 된 적이 있었다.
또한 현대도 삼성경제연구소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 이계안 기획실 전무는 사업교환을 통한 구조조정이야말로 차입경영의 한계에서 벗어나고 재무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공언하였다. 심지어 현대의 한 기조실 임원은 이러한 방법이 바로 비용을 조금 들이면서 기업과 은행을 살리는 '마이다스의 손'이라고까지 말하였다. 그 밖에도 서울대 조동성 교수는 97년 11월 26일자 조선일보에 'IMF 시대 생존전략'이라는 재벌 기업간 사업교환 방식을 언급하는 칼럼을 게재하였다. 조교수는 "기업경영자가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제품 한 두가지를 포기하는 정도의 간단한 사업구조조정 차원이 아니라, 재벌기업간에 2-3개씩을 주고받는 거대한 흡수, 합병을 통한 전문화를 시도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 조세부담 등 비용이 많이 든다는 어려움은 있겠으나 무릇 변화에는 비용이 따르는 법"이라고 밝혔다. 즉, 이러한 여러 재계와 학계의 생각이 정치권으로 들어가 구체적인 결실을 본 것이 바로 '빅딜(BIG DEAL)' 즉 '사업 맞교환'이었던 것이다.

어느 경로를 통하여 재계의 이러한 생각이 정치권으로 넘어갔는지에 대한 공식적인 발표는 아직 없다. 그 당시 5대 그룹의 구조조정본부와 정부가 모인 회의가 주재되어 빅딜을 통한 구조조정 방식이 거론되었던 것으로 간주되어질 뿐이다. 그렇다면 재계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제공되어진 빅딜 아이디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추진되었던 것일까?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자민련의 박태준 총재가 비밀리에 일을 맡긴 곳은 포스코 경영연구소(POSRI)였다. 12월 31일에 박총재는 국민회의 김민석 의원의 소개로 인수합병(M&A) 전문가인 윤현수 코미트 M&A사 사장을 만나 POSRI의 황경로 회장을 돕도록 지시했다. 사업교환의 실마리를 어디에서 잡아 어떻게 추진해야 할지 뚜렷한 감이 잡히지 않아 고민하던 상황에서, 윤사장으로부터 3시간여 동안 빅딜의 필요성과 구체적 방법론에 대해 듣고 그 자리에서 발탁한 것이다. 그 결과 98년 1월 24일 POSRI에서 '빅딜에 관한 의견'이라는 5각 빅딜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것은 5대그룹 가운데 어떤 그룹이 어떤 업종을 가장 잘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점수를 매겨 1등과 2등을 남기고 나머지 3등 이하는 모두 1등에게 몰아주는 구조로, 공식적인 빅딜의 첫 보고서였다. 그런데 이 5각 빅딜을 실행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즉, 5개 그룹이 여러 가지 업종에 모두 참가한 상태에서 순열을 매기기란 매우 복잡하고 어려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단순화시켜 나온 대안이 바로 3각 빅딜로 현대가 석유화학을 LG에 주고 LG는 삼성에 반도체를 주고 삼성은 자동차를 현대에 준다는 시나리오이다.

빅딜에 대한 정부의 의지

대선이 끝난 12월 하순 이후 당시 김원길 국민회의 정책위의장은 대그룹 전문경영인들을 만나 대기업 구조조정 방법에 대한 의견을 듣는 중에 "현실 경제를 안다면 빅딜은 눈에 보이는 해결방법이었다. 당시 고금리 아래에서 재벌들의 사업이 그대로 지속되기 어려웠다."고 서슴없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빅딜은 시장경제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며 이는 5공식의 강제 통합과 같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면서 이를 보다 못한 김대통령이 빅딜 자체를 부인하게 됨에 따라 물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박총재팀에서는 3각 빅딜을 계속해서 진행시켰으나, LG의 거센 반발로 난항을 겪게 되었다. 정보통신을 주력 산업으로 키우려던 LG로서는 반도체 사업 포기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로부터 석유화학을 가져와 봐야 아무런 득이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LG는 계속해서 버텼고, 박총재는 나름대로 98년 6월 6일 김대통령의 미국 방문전까지 이 3각 빅딜안을 성사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였다. 대통령이 기업구조조정이라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가지고 미국 방문 길에 나서야 외자 유치에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방미 하루 전인 6월 5일까지 LG그룹의 이문호 당시 구조조정 본부장을 자민련 당사로 불러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LG는 여전히 참여불가 입장을 고수하였다. 결국 김대통령은 'LG가 거부한다'는 보고를 듣고 미국 방문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6월 9일 돌연 LG가 3각 빅딜안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6월 10일 드디어 김중권 비서실장이 조선호텔에서 열린 능률협회 조찬 강연회에서 "대그룹간의 빅딜이 곧 발표될 것"이라는 폭탄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물밑에 들어가 있던 빅딜을 수면위로 떠오르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으나, 김실장의 발언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아 또 다시 흐지부지하게 되버려, 마치 김실장의 실수로 마무리되는 듯하였다. 그런데 6월 13일 LA에서 가진 기자 회견에서 김대통령이 빅딜의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그 실체를 들어내게 되었다. 14일 귀국회견에서도 빅딜을 추진할 뜻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빅딜이건, 작은딜이건 기업들은 반드시 개혁을 해야 하고 5대 그룹이 앞장을 서야 한다"며 강력한 추진의사를 보였다. 이어 16일날 국무회의에서는 "빅딜을 하려고 도장을 찍어 놓고서 또다시 안된다고 호도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된다"고 하였으며, 그 다음날인 17일 전경련 회장 및 경제단체 대표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빅딜만 해도 난 간절히 바랬다. 몇 분들이 빅딜이야기를 다 하고 도장을 찍으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놓고 도장을 찍으러 나오지 않았다."고 하여 다시 한번 빅딜을 강조하며 이를 기정 사실화 시켰다. 대통령이 이처럼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자 관료 하나 둘 빅딜을 해야 한다며 포문을 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재계의 핵심인 전경련에서도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재계로 넘어 온 빅딜

박태준 총재측은 6월 10일 김중권 비서실장의 발언 이후에도 3각 빅딜의 성사를 위해 애를 썼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황경로 경제특보는 6월 13-14일 삼성 구조조정본부 지승림 부사장, 현대 경영전략팀 이계안 부사장, LG 구조조정본부 이문호 사장을 연쇄 접촉하였다. 그러나 3각 빅딜을 거부하는 거센 흐름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가운데 17일 김대중 대통령과 경제 6단체장 회동에서 김우중 전경련 회장단과의 간담회가 예고됐다.
전경련에서는 정부가 제안한 3각 빅딜이 아닌 자율적인 형식을 강구하였고, 이것에 대해 박총재는 더 이상 정치권에서 강제적인 방법으로 추진할 경우 후에 소송 등의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찬성하였다. 이로 인해 빅딜의 추진 세력이 전경련으로 옮겨오게 되었고 이것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정·재계 간담회'이다. 7월 4일 대통령과 재계가 모인 간담회 자리에서 9개항의 합의문이 나왔고, 그 중 세 번째 항에서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빅딜 추진이 언급되었는데, '대기업간 빅딜은 해당 기업이 자율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정부는 사업교환이 원활히 되도록 제도적 지원 방안을 강구하는데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이날 회동에서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빅딜이) 신속히 추진되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밝혔으며 이러한 정·재계 간담회를 활성화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98년 7월 26일 제1차 정·재계 간담회가 열렸고, 정부의 "빅딜하면 뭐든지 지원해 주겠다"는 말에 재계가 빅딜 쪽으로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8월 7일 제2차 정·재계 간담회가 끝난 후 김우중 회장과 5대 그룹 회장들이 비밀리에 모인 자리에서 자동차, 반도체 2사 체제로 석유화학은 1사 체제라는 원칙을 수립하였다. 이것은 정치권이 주도한 3각 빅딜의 연장선상에서 이것에 포함된 3개 업종의 구조조정 원칙을 새로 확인한 것이었다. 제2차 정·재계 정책간담회에서 정부와 재계는 8월말이라는 구체적 시한을 못박아 빅딜을 포함한 산업별 구조조정안을 마련키로 전격 합의했다. 정부가 구조조정 대상 업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재계는 자동차·반도체·석유화학 등 업종의 구조조정 방향을 정하고 구체적인 안의 마련을 위한 태스크 포스팀을 가동함으로써 빅딜은 비로소 급류를 타게 되었다. 산자부가 내부적으로 만든 '10개 업종 구조조정 방향'은 매우 구체성을 띠었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업종별로 몇 개사가 적당하다고 밝히고 업종별로 문제가 있는 업체의 퇴출이나 매각, 공장 폐쇄까지 거론하고 있었다. 정부는 특히 10개 업종 중 당초 3각 빅딜에 포함된 자동차·반도체·석유화학은 반드시 포함시키라고 주문하였다.
그 중 전경련의 빅딜 협상에서 막판까지 논란이 되었던 업종은 바로 반도체 부문이었다. 현대전자와 LG반도체가 단일회사로 일원화한다는 원칙에는 일찌감치 합의해 놓았으나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도체 2사 체제'에 합의한 삼성·현대·LG는 이후 논의를 통해 삼성은 그대로 두고, 부채가 많은 현대와 LG가 합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지분율 배분문제에서 처음부터, 현대는 "누군가 경영권을 갖고 가야 한다"는 입장을 펼쳤고, LG는 공동경영을 주장하였다. 반도체를 둘러싼 소란은 9월이 되어도 계속되었고, '반도체는 일원화해 운영하되 지분 비율은 계속 논의키로 한다'는 '어정쩡한' 합의문에 양측의 사인을 받아내는데 만족해야 했다.
결국 LG반도체와 현대전자의 반도체 부문 통합을 전제로 책임 경영주체 선정을 세계적 전문평가기관인 ADL에 맡기게 되었다. ADL는 "반도체 통합은 한국 경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경영주체로는 현대전자가 LG반도체에 비해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물론 이에 대해 LG는 반발을 했지만 최종적으로 현대에 경영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슈퍼딜 이뤄지기까지... 삼성 vs 대우

기아자동차 입찰이 끝난 직후인 98년 11월 중순 대우의 김태구 사장이 삼성의 이학수 사장에게 만나자는 제의를 하였다. 그 당시는 삼성이 기아자동차 인수를 사실상 포기한 이후로, 삼성자동차 처리 문제가 정치권과 재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었으며 박태준 총재와 김우중 회장은 다시 자동차 2사 체제를 거론하던 시기였다. 만난 자리에서 대우 김태구 사장은 이학수 사장에게 "삼성차 문제가 어떻게든 해결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대우가 책임지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했다. 이학수 사장은 "그러면 대우는 무엇을 내놓겠느냐"고 물었고 대우에서 건설을 제시하자, 삼성은 이를 거절하였다. 대우에서는 다시 전자를 제시하였고 이에, 삼성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김우중 회장은 이헌재 금감위원장에게 "삼성과 사업교환 이야기가 상당히 진전되었으니 빅딜대상에 넣어달라"고 하였다. 이위원장은 며칠 후 이규성 재경부 장관과 함께 이건희 삼성 회장, 김우중 대우 회장을 만나 양 그룹이 사업교환에 합의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은 12월 2일 기자들에게 "삼성자동차를 부채규모가 비슷한 기업과 '딜(DEAL)'하는 방안이 추진되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고, 양 그룹은 12월 7일 김대중 대통령이 주재한 정·재계 간담회를 앞두고 합의서에 서명하였다. 이 합의가 발표되자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부산의 삼성자동차 근로자들이 서울역으로 몰려와 날마다 시위를 벌였고, 대우전자 직원들도 마찬가지로 연일 시위를 벌여 자신들의 불만을 표현하였다. 그러자 이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던 정부에서는 대우가 삼성자동차 부산 공장을 먼저 인수하고 후에 정산하는 '선(先)인수 후(後)정산' 방식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대우는 이 '선인수 후정산' 방식에 반대하였다. 실제로 이것을 따르게 되면 'BARGAINING POWER'가 약해져 후에 값을 높게 받기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이건희 회장과 김우중 회장을 만나 부산 공장 문제의 해결이 급선무이니 선인수 후정산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사를 표명하게 되자, 결국 대우측에서도 2월 2일 여러차례의 수정을 거듭한 삼성차의 선인수안에 합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우는 끝까지 "어떻게 경영권을 잠정인수하느냐 삼성차 가동은 삼성책임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삼성은 "그렇다면 대우가 자동차를 먼저 인수하는 것과 똑같이 대우전자 경영권을 먼저 인수하겠다"고 제안하였다. 이에, 대우는 "삼성자동차를 선인수 하라는 것은 삼성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대우는 그렇게 급박하지 않다"며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이는 그 당시 삼성이 대우전자의 가치를 나름대로 실사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을 대우가 알게 되었고 삼성이 들어와 대우전자를 속속들이 파헤치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거절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이렇게 서로의 계산이 틀려 양 그룹은 대우전자에 대한 구체적인 협상을 한 적도 없었고, 삼성이 결국 우여곡절 끝에 삼성자동차를 법정관리로 가져가면서 대우전자는 외자유치라는 제갈길로 가게 되었다.

삼성자동차 빅딜의 전면 백지화

최근 들어 가장 많은 빈도로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것이 바로 대우문제일 것이다. 대우가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 빅딜 한가지 문제 때문만은 아니지만, 이것이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금융감독위원회에서는 98년 11월부터 대우의 워크아웃 플랜을 만들고 있었다. 다시 말해, 대우가 99년 8월 워크아웃에 들어가기 전에 금감위에서 98년 11월, 12월, 99년 1월, 3월에 걸쳐 4번의 워크아웃 플랜을 만든 것이다. 이는 대우에 한편으로는 어려운 자금 사정이, 다른 한편으로는 삼성차와 대우전자를 맞바꾸기 위한 빅딜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6월 30일 삼성과 대우의 빅딜이 전면 백지화가 되기까지 금감위의 중재안은 3가지 핵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첫째는 삼성자동차의 자산과 부채를 대우자동차에 넘기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삼성금융계열사들이 삼성자동차에 지급보증을 포함하여 대출해 준 1조 2000억원을 삼성이 자체 처리하는 것이었으며, 세 번째는 삼성계열사들이 대우자동차에 CB나 우선주로 2조원을 투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세 가지안 모두를 삼성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6월 11일 삼성의 이학수 사장은 오전 9시에 강봉균 재경부 장관을 만난 후 연달아 10시 반에 금감위에서 이헌재 위원장을 만나 '삼성에서 자동차를 대우전자와 맞바꾸는 것을 취소하고 법정관리로 가겠다'고 공식적으로 첫 운을 띄웠다. 앞서 언급한 금감위의 3가지 중재안의 내용을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첫째, 삼성 금융계열사 등이 삼성자동차에 빌려 준 1조 2천억원을 자체 처리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고 하였다. 즉, 삼성자동차가 부도나 법정관리가 아닌 상황에선 이를 법적으로 대손 처리하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대우자동차가 발행한 전환사채(CB) 인수나 대우자동차 출자를 통해 2조원을 투자해야 하는데 대우자동차의 신용등급이 투자적격이 아니라는 문제를 들었다. 그래서 설사 계열사들이 투자하더라도 소액주주들이 반발하여 손해배상 대표소송을 하면 경영진 개인이 물어내야 하기 때문에 계열사 사장들이 압박감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금감위 중재안에 따른 자산·부채 처리방안을 해결한다해도 남아 있는 어려운 문제들이 많아 추가 협상이 간단치 않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지난 3월 22일 김우중 회장과 이건희 회장이 만나 '선인수 후정산'안에 합의하면서 부산의 삼성자동차를 가동시키는 대신 삼성이 SM5를 연간 1만 5천대 이상 책임 판매하고 미달하는 물량에 대해서는 대우에 금전적으로 보상하기로 하였는데, SM5 라인의 가동을 위해서 대우에 대출해 주기로 한 1회전 운전자금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3월 22일의 합의에서 삼성 금융계열사들이 회수한 8천억원을 원상회복해 주기로 요구하였는데 대우에 대한 재대출 문제도 쉽지 않다고 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설명하면서 삼성차가 법정관리로 가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였다.그러나, 이위원장은 "이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빅딜 합의를 깬다는 것은 현실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실제로 이위원장은 "나머지 빚 2조원을 어떻게 한다는 얘기 없이 법정관리로 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고 모든 것을 삼성이 다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삼성의 이학수 사장은 "부채 2조원에 대한 대책은 곧 만들 것이며, 부산경제에 대한 대책은 이미 세워놓았다"고 하였다. 금감위원장보다 먼저 만났던 강봉균 장관 역시 "법정관리로 가서 부산 경제에 대해 손을 놓겠다는 것인데 그러면 지금까지 뭐 때문에 고생을 해 왔느냐. 나머지 빚 2조원에 대한 명확한 처리방법이 나와야 한다"며 마찬가지로 삼성의 이러한 의견에 심한 반발을 하였다.
삼성 이학수 사장은 6월 17일 정도에 다시 정부 당국자들을 찾아가, 이건희 회장이 주당 가격이 약 70만원 정도가 되는 삼성생명 주식 4백만주를 현물로 출자하겠다는 안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다름 아닌 법정관리로 가되 부채를 삼성이 떠 안는 '파산형 정리 계획안'을 마련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 당국자들은 6월 20일 경에 "부채 처리는 삼성이 맡아라. 또 법정관리로 인한 문제는 모두 책임져라"는 단서를 달면서 삼성에 원칙적인 입장만을 표명하였다.
삼성자동차 빅딜의 백지화를 도운 사람은 다름 아닌 자민련의 박태준 총재였다. 삼성은 정부에 백지화 뜻을 비추었으나 긍정적인

전수미 연구원(교육정보팀) smjun@ips.or.kr